젊은 연구자·활동가 좌담
지난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위안부’ 운동의 젊은 연구자·활동가들에게 바람직한 운동 방향과 ‘포스트 피해자 시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좌담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최나현 한베평화재단 활동가, 백시진 전 정대협 활동가, 최성용 문화비평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최나현 한베평화재단 활동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피해자와 활동가 이견 조율 사회가 지켜보며 동참해 주길 가족들·연대자·가해자 등 증언 주체 확장 노력도 필요진행 피해자와 활동가가 갈등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해도 지향이 다르거나 단체에 등 돌린 피해자를 운동은 어떻게 껴안아야 할까. 국민성금으로 세워진 ‘기억의 터’에서 정의연을 배척한 일부 할머니 이름이 지워지는 등 정의연이 입장에 따라 피해자를 선별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백시진 피해자의 의견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는 현재 살아 있는 생존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학순의 첫 증언으로 위안부 피해가 공론화되기 전에 숨진 이들,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나서지 못한 이들까지 모두 포함하면 피해자를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모든 위안부 피해자가 운동단체 한 곳에만 속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최성용 사실 처음 피해자를 ‘선별’한 건 활동단체가 아니라 일본 정부다. 1995년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받겠다고 동의한 피해자에게만 당시 일본 총리의 사죄 편지가 전달되는, 이른바 ‘조건부 사죄’를 하고 피해자를 일본 정부의 의향에 따라야 할 객체로만 여겼다. 여기서 피해자 간의 분열, 피해자와 활동가 간의 갈등이 빚어진 측면이 크다. 이런 측면을 배제한 채 일본 정부를 비판하던 활동단체에 되레 피해자를 선별했다는 혐의를 덧씌우는 것은 부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진행 정의연 중심의 기존 위안부 운동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백시진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문제지만, ‘민족’이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사안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일본 제국이 위안부를 동원·대우한 방식 등이 인종, 민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1948년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는 아시아 여성을 제외한 네덜란드 여성에 대한 폭력만을 처벌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종, 민족 열쇳말을 고려하지 않으면 폭력의 양상이 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났는지 간과할 위험이 있다. 운동 초기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처음 파고들게 된 계기도 일본인들의 ‘기생관광’ 문제다.
백시진 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활동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할머니들 말씀 이해하려면 과거 발언·생애 함께 고려를 민족주의 관점 빼고 본다면 폭력의 양상 포괄적 이해 못해진행 그럼에도 기존 운동이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으로 위안부 문제를 접근했다거나, 대중의 민족주의 정서에만 호소해왔다는 비판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최나현 기존 운동에서 ‘순결한 민족의 딸이던 피해자들이 일제에 짓밟혔다’는 식의 민족주의 수사가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운동이 모두 민족주의적이었다고 얘기하는 건 수십년 운동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운동도 당대 사회적 상황과 인식에 영향을 받다보니 시기별로 목표나 활동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지금보다 더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가 공고하던 시기에는 운동 역시 민족주의적 지향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의연을 중심으로 한 기존 운동이 대중의 지지와 동력을 얻기 위해 사회 저변에 깔린 민족주의 정서를 활용하려고만 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연의 운동은 젊은 활동가들의 문제 제기와 기존 활동가·증언자들의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민족주의적 관점의 한계를 지적하고 보편적 여성인권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 전세계의 또다른 성폭력 사안과 연대해왔다. 가령 김복동·길원옥 할머니의 의지로 결성된 ‘나비기금’은 콩고, 우간다, 베트남 등의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과 아동을 지원하는 데도 쓰이지 않았나. 평화나비에서 한베평화재단으로 넘어가 활동하고 있는 나 자신도 산증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최성용 “정의연을 공격하는 자가 토착왜구”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구호를 외치는 소수 진보진영 지지자들 외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소수였다. 이 점은 우리 사회 한계이기도 하지만, 운동이 뼈아프게 자각하고 나아가야 한다.
최성용 문화비평가.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30년전 김학순 용기있는 증언 한국 미투운동의 소중한 자산 지금 성폭력 피해자들에 힘돼 위안부 문제해결 되레 현재형진행 이번 논란 이후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요구는 더욱 커졌다. ‘포스트 피해자 시대’의 운동이 넘어야 할 벽은 더 높아진 느낌이다. 백시진 위안부 문제를 소수의 개인에게만 벌어진 피해로 생각하지 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도화된 성차별·성폭력으로 인식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 이전에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자 했던 ‘공창제’가 존재했다. 이후엔 ‘군인들의 성욕은 해소돼야 한다’는 인식 아래 국가 차원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성매매가 묵인되고 적극 장려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는 오늘날 많은 남성들이 룸살롱 등 성매매 업소에 가서 결속을 다지는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위안부 운동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성차별·성폭력의 연결고리를 더 구체화해 세상에 알려나갈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최성용 김학순의 증언은 한국 미투운동의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두려운 와중에 성폭력 피해를 증언하고 공론화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이들에게 30년 전부터 이미 용기 내어 피해를 알려온 이들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큰 격려가 되지 않을까. 위안부 피해자와 활동단체가 함께 협력하고 충돌하며 연대를 통해 성장해온 지난 수십년의 역사 역시 많은 성폭력 피해자·연대자들에게 소중한 교육 자료가 될 수 있다. 김학순의 증언을 단순히 ‘최초의 미투’라고 수식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들의 경험을 끊임없이 오늘날의 언어와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최나현 ‘증언’의 주체를 확장해나가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증언은 피해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생애를 옆에서 지켜봐온 가족들, 오랫동안 피해자 곁에 서서 증언을 돕고 연대해온 이들, 직접적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자신 안의 비슷한 트라우마를 발견한 이들도 위안부 문제의 훌륭한 증언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그간 ‘가해자’로 규정돼온 사람들 역시 ‘말하기의 장’에 초대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베평화재단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함께 참전 군인들의 목소리도 수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국가가 초래한 전쟁 상황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데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 위안부 운동 역시 자신의 가해 경험을 고백하고 위안소의 위치나 운영 방식 등을 알린 일본군 남성들의 증언을 통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더 명확히 규정할 수 있었다. 진행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연구·활동의 초입에 섰다. 최나현 평화나비 운동을 2013년 시작했다. 운동가로서 운 좋게 피해자를 직접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다. 그래서인지 대학생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도 내 또래보다 더 위안부 문제를 과거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위안부 문제를 기억과 추모의 대상으로만 접근해 과거에 묶어둬선 안 되겠다고 절감한다. 과거와 현재, 위안부 문제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등 또다른 성폭력 문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계인이 되려 한다. 백시진 선배 활동가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알아버린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미 위안부 문제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성폭력의 고리를 알아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알아버린 책임’을 이행할 수밖에 없다. 최성용 인종학살 범죄에 묵인·동조해온 독일 사회에 대한 내부적 비판도 당대가 아닌 68혁명 이후 청년 세대에 의해서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도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진행·정리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