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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법개혁 ‘골든타임’ 놓치고 있다

등록 2020-09-24 04:59수정 2020-09-24 09:39

’김명수 대법원 3년’ 박경열 판사 기고
2017년 9월26일 열린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식. 신소영 기자 viator@hai.co.kr
2017년 9월26일 열린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식. 신소영 기자 viator@hai.co.kr
사법농단 사태는 판사들에게도 큰 충격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특정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 한 일, 판사들 ‘성향’을 문제 삼아 형사재판에서 배제하려 한 일, 심지어 ‘물의’를 야기한다며 말 안 듣는 판사들 목록을 만들어 인사에 적용하려 한 일까지. 국민이 기댈 최후의 보루라는 사명으로 일하던 다수의 판사는 다른 곳도 아닌 사법부 안에서 생긴 부조리에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 초기부터 법원마다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을 촉구하는 판사회의가 여러 차례 열렸다. 그리고 전국 각 법원 대표 125명으로 구성된 전국법관대표회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법관으로서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하여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이번 사태로 주권자인 국민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신뢰와 법관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된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하여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추궁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근본적이고 실효적인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여 실행할 것을 다짐한다.”(2018. 6.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한 전국법관대표회의 선언)

물론 이 엄중한 사태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왜곡해서 행사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사법행정 시스템에 있다. 사법농단 사태는 대법원장이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사권을 비롯한 모든 사법행정권을 가졌음에도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 대법원장 1인 체제에서, 판사가 오직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고 잘못된 사법행정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 소수견해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풍토에서 인권과 소수자 보호를 위한 사법 본연의 역할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이는 그동안의 사법행정 구조가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뜻과 같다.

이제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행정권을 다양한 층위로 분산하고 감시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사법행정은 판사의 독립된 심판을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하면서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한 국민의 권리를 뒷받침하도록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파격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취임한 배경에는 이러한 소명을 담대하게 이행하라는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난 3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는 그러한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안타깝게도 비상사태를 초래한 이들에 대한 책임추궁이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법원장 후보 추천제 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권한의 분산은 제한적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제안이 점점 선별적으로 수용되고 개혁과제 설정과 추진은 여전히 대법원장 뜻에 좌우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법개혁의 당위성과 각론을 법원 안팎에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도 돌이켜볼 일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당시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데 미흡하다는 법원 안팎의 비판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사법개혁을 위한 ‘국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대법원장 권한 분산, 관료적 사법의 상징이 되어버린 법원행정처를 대체할 합의제 사법행정기구를 도입하는 일, 법관 독립과 사법행정에 관한 수평적 의제 제안을 위해 설립된 전국법관대표회의를 법제화하는 일은 모두 국회의 몫이다. 법원조직법 개정 없는 제도개혁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특히 새로운 사법행정기구를 도입하는 일은 그 자체로 개혁의 상징이 될 뿐 아니라 지속적인 개혁 추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권한을 분산하고 개방하면 사법행정에 관한 사회적 수용 가능성은 커지고 사법신뢰를 높이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국회가 이러한 과업에 얼마나 집중하고 힘을 쏟고 있는지 의문이다. 산발적으로 입법안이 제시되고 있지만 공론화를 위한 국회 차원의 노력은 아직 부족하다.

모든 개혁에는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개혁의 이유와 당위성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사법농단 사태는 10여년 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재판개입 사태에 대한 책임 규명과 성찰의 부재라는 토양 속에서 생겨난 결과다. 당시에도 논란의 당사자는 책임지지 않았고, 근본적인 후속 조처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사이 법원은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더욱 관료화되어 갔다.

사법개혁의 고갱이는 헌법의 명령에 따라 독립된 심판을 통해 재판청구권을 비롯한 주권자인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하는 것이다. 더는 후순위로 밀려서는 안 될 중요한 ‘국가적 과제’이다. 대법원장과 국회 그리고 독립된 사법권의 행사 주체인 법관을 비롯한 법원 구성원 모두가 자기 영역에서 필요한 고민과 실천을 집중해서 하지 않는다면 사법개혁은 다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 것이다. 사법개혁의 ‘골든타임’은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

박경열(수원지법 안산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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