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0일 ‘제5차 전태일 50주기 캠페인’ 참가자들이 ‘전태일 정신’과 ‘근로기준법 준수하라’가 적힌 손펼침막을 들고 있다. 박종식 기자
계약직 노동자인 ㄱ씨는 임원의 “당장 그만두라”는 말 한마디에 해고당했다. 임원은 근로기준법 27조와 달리 서면으로 해고를 통보하지도 않았다.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를 신청했지만 고용노동부 조사관은 ‘부당해고를 인정받으려면 상시근로자가 5명 이상이어야 한다’며 수수방관했다. 근로기준법은 직원 5명 미만 영세사업장엔 적용되지 않는다. ㄱ씨가 다니던 회사에는 고용보험 가입자가 3명뿐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지 50년이 흘렀지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청년과 비정규직,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절반은 노동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4일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전태일 50년 직장인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인 10명 중 4명은 근기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근기법이 안 지켜지고 있다고 답한 비율은 정규직(34.7%)보다 비정규직(47.8%)에서 높았고 50~55살(36.0%)보다는 20대(45.1%)에서 높았다. 또 월급이 500만원을 넘긴 고소득 집단(26.4%)보다 월급 150만원 이하 저소득 집단(41.2%)에서 근기법이 준수되지 않고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이번 조사는 9월7~10일 직장갑질119의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 기관 엠브레인퍼블릭이 직장인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포인트)했다.
이번 조사에선 노동자의 처우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197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거나 당시보다 나빠졌다고 응답한 비율도 10명 중 3명에 이르렀다. 정규직 노동자의 69.8%는 ‘노동자 처우가 개선됐다’고 응답한 데 견줘 비정규직 노동자는 52.8%만 ‘과거보다 좋아졌다’고 응답했다. 또 고소득 집단(81.3%)과 저소득 집단(54.0%) 간에서도 인식차가 두드러졌다. 특히 ‘노동존중’을 내걸고 당선된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노동자의 삶과 처우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응답(51.2%)이 ‘개선됐다’는 응답(48.8%)보다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응답자들은 일터에서 여전히 지켜지지 않는 근기법으로 ‘노동시간 및 휴가’(51.0%)를 꼽았는데, 직급이 낮을수록 노동시간 및 휴가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응답이 높았다. 관리자급은 28.2%만 노동시간과 휴가가 지켜지지 않는다고 답한 반면 일반 사원급에선 50.5%가 불만을 나타냈다. 아울러 ‘임금, 연장·야간·휴일근로 수당, 퇴직금 등 임금 체불’(48.0%) 등이 뒤를 이었고 모성보호(임산부 노동시간 제한, 보건휴가 등)가 안 지켜진다는 응답도 여성(43.6%)을 중심으로 높게 나타났다.
직장갑질119는 “설문조사 결과, 정부 정책이 일터의 약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가) 노동법 밖에 있는 이 시대의 ‘전태일과 시다’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해고 제한 등 근기법의 주요 조항들이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되도록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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