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저녁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장애인의 공연장 내 재난대피 워크숍’ 참가자들이 비상시 대피 연습을 하고 있다. 워크숍 기획팀 문소영 제공
“불이야! 대피하세요!”
지난 25일 저녁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음센터’ 5층 강당에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연극을 보던 50여명의 관객이 웅성거렸다. 이들 중 상당수는 “밖으로 달려나가라” “경고등을 보고 스태프의 음성 안내에 따라 움직여라”는 안내방송에 따라 민첩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안내방송을 듣고도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휠체어를 타거나, 케인(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을 쥔 10여명의 장애인이었다. 수어 통역으로 공연을 관람하던 이도 있었다. 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다른 관객들이 이들의 대피를 도왔다. 휠체어를 탄 관객이 마지막으로 대피에 성공하자, 공연 관계자는 “실제 화재가 아닌 대피 연습”이었다고 알렸다. 관객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보가 울린 지 5분이 훌쩍 넘어서야 대피가 완료됐기 때문에 실제 상황이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이날 대피 연습은 ‘장애인의 공연장 내 재난대피 워크숍’(워크숍)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중 사전 예고 없이 이뤄졌다. 워크숍은 안전한 문화예술 환경 조성을 위한 문화체육관광부 연극 지원사업의 하나로, 지난 6월부터 장애인 극단 ‘애인’ 김지수 대표와 김원영 변호사 등이 주도해 기획됐다.
“예전에도 지하 공연장에 갔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처음 보는 스태프에게 업혔어요. 비상시 ‘‘불이야!’ 소리친 다음 바깥으로 달려나가라’고 안내받았죠. 이럴 때 저는 다른 관객들이 탈출하는 뒷모습만 마냥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건가요?” (30대 지체장애인) 워크숍 참가자들은 “재난 발생 시 장애 유형에 따라 세분화된 매뉴얼이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30대 청각장애인은 “비상시 알람을 들을 수 없어 휴대전화 문자로 상황을 전달받는 게 중요하다. 대피법도 안내받지 못한 채 무작정 공연 시작 전 휴대전화를 끄라고 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고 토로했다. 30대 시각장애인은 “공연 시작 전 미리 와서 직접 시설을 거닐 수 있게 하거나, 공연장 모형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게 해 대피로를 파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뛰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심리적 안정을 도와줄 동행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장애인도 있었다.
동일한 장애라 하더라도 경중에 따라 필요한 지원이 달라진다. 장애가 심하지 않은 장애인은 계단 입구까지 이동해 난간을 잡는 데까지 도움을 받으면 이후 스스로 대피할 수 있다. 하지만 중증 장애인은 비상시 업고 이동할 사람이 필요하다. 지체장애가 있는 김지수 대표는 “옆 관람객의 ‘선의’에 기대기보다 공연 주최 쪽이 담당자를 사전에 지정해둬야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대다수 공연장에 점자블록, 경사로 등 장애인을 위한 안전·편의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 장애 유형에 따른 대피 매뉴얼을 만들고 사전에 숙지하는 일은 필수다. 하지만 현행 공연법은 공연 담당자가 공연 시작 전 ‘장애인·노인·아동의 도움 요청 방법’을 알려야 한다고 밝힐 뿐, 구체적인 요건이나 절차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영국은 정부가 장애인 방문객을 위해 대피 알림을 받을 방법, 보조자 필요 여부 등이 담긴 ‘개인별 비상대피 계획’을 세우고 안내하도록 권고한다. 워크숍 기획팀은 다음달 장애인을 위한 국내외 대피 매뉴얼 등이 담긴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