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017년 8월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원 전 원장 등은 2012년 대선 때 조직적인 ‘사이버 여론 조작’을 벌인 혐의(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로 2013년 6월 기소됐다. 재판이 19개월 동안 공전하면서 재판 지연 논란까지 일었다. 결국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교체되고 나서야 2017년 8월 징역 4년 형이 선고됐고, 이듬해 4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확정됐다. 검찰은 이 석연치 않은 재판 과정에 법원행정처의 입김이 미쳤다고 본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사법부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는 사안들에 대하여 사건 처리 방향과 시기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국무총리 대국민담화의 영향 분석과 대응방향 검토’ 문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내부 문건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사법부 안팎에 적잖은 충격을 줬다. 법원행정처가 진행 중인 재판을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한 정황이자, 정무적 판단에 따라 법원행정처가 일선 재판에 개입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가 사법부가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쥐고 있다고 표현한 사안들에 관해 ‘재판 거래’, ‘재판 개입’ 의혹이 제기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도 그중 하나다. 당시 청와대는 재판 결과에 따라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원 전 원장 재판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원 전 원장 등은 2012년 대선 때 조직적인 ‘사이버 여론 조작’을 벌인 혐의(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로 2013년 6월 기소됐다. 재판 과정은 지난하고 험난했다. 5년 동안 1심→2심→대법원 파기환송→파기환송심→대법원까지 다섯 단계에 걸쳐 재판이 진행됐다.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에 대한 유무죄, 증거능력에 대한 판단 등이 엎치락뒤치락했고, 파기환송심에서 재판이 19개월 동안 공전하면서 재판 지연 논란까지 일었다. 결국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교체되고 나서야 2017년 8월 징역 4년 형이 선고됐고, 이듬해 4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확정됐다. 검찰은 이 석연치 않은 재판 과정에 법원행정처의 입김이 미쳤다고 본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는 국정원 대선개입 재판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한 것으로 보인다. 1심부터 재상고심까지 주요 국면별로 다수의 문건이 생산됐다. 재판 진행 상황이나 선고 결과를 분석해 보고하거나, 선고 결과에 따른 사법부 안팎의 파장과 대응을 예상해 정리한 내용 등이다.
1심과 달리 공직선거법 위반죄까지 인정돼 원 전 원장이 법정구속된 2015년 2월9일 항소심 전후 생산된 문건을 살펴보자. 정다주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은 항소심 선고를 하루 앞둔 8일 항소 기각과 인용에 따른 대응 시나리오를 예상했고, 바로 다음날인 10일에는 선고에 따른 각계 동향을 정리했다. 여기에는 ‘상고심을 최대한 조속히 진행해 청와대의 불만과 오해를 최소화한다’는 대책도 포함됐다. 항소심 당일에는 박성준 사법지원실 심의관이 항소심 판결을 분석·요약해 문건을 작성하고, 이 문건이 상고심을 맡게 될 대법원 쪽 수석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하여금 이렇게 재판상 독립을 침해하는 문건을 작성하게 하는 등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이 문건은 판사 개인의 ‘아이디어’에 그치거나 청와대를 비롯한 대외관계에서 법원행정처가 취해야 할 ‘스탠스’(입장)를 정하기 위해 작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맞선다. 검찰 주장과 같은 재판 개입은 없었고, 사법행정상 정당한 업무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재판 개입 의혹에 대한 기존 주장과 다르지 않다. 올해 6월26일 서증조사 때 박 전 법원행정처장 쪽 변호인이 한 발언이다.
“이런 비유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법행정 하시는 분들은 가장이고 판사들은 그 안에 있는 식구입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은 당연히 분석해야죠. 앞으로 어떤 후폭풍이 나올지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이 사법행정의 역할이니까요. 태풍이 올 때 경상도로 갈지 전라도로 갈지 분석해 대책을 세우는 건 사법행정 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문서가 정상적인 심의관들의 활동인데 범죄 예비 행위 내지는 관련 있는 행위로 국민들한테 비치는 게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017년 8월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원 전 원장 등은 2012년 대선 때 조직적인 ‘사이버 여론 조작’을 벌인 혐의(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로 2013년 6월 기소됐다. 재판이 19개월 동안 공전하면서 재판 지연 논란까지 일었다. 결국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교체되고 나서야 2017년 8월 징역 4년 형이 선고됐고, 이듬해 4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확정됐다. 검찰은 이 석연치 않은 재판 과정에 법원행정처의 입김이 미쳤다고 본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그러나 재판부와 법원행정처가 직접 소통하거나 재판부가 아예 직접 작성했다고 의심받는 문건까지 발견됐다. 법원행정처와 일선 재판부의 교감을 뒷받침하는 좀 더 직접적인 정황이다.
‘원세훈 사건 환송 후 당심(서울고법 2015노1998호) 심리 방향’ 문건은 2015년 10월6일에 작성됐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사건이 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시철)에 배당되고 9월18일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다. 재판부가 어떻게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하는지, 공모관계를 포함해 재판부가 어떤 쟁점을 주요하게 살펴보는지 A4용지 3쪽에 걸쳐 상세하게 정리됐다. 법정 밖에서 한 석명(사실을 설명해 내용을 밝히는 것) 준비 명령 등 재판부 구성원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내용들도 포함됐다.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될 수 있는 (원세훈 피고인) 최초의 직무상 발언 시기는 2010. 1. 20인데 이를 기초로 2009. 2. 14 이후 범행에 관한 공모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너무 작위적 사실인정이라는 것이 재판장의 입장임.”
이 문건의 마지막 대목에는 이런 설명이 덧붙었다. “재판장과 주심판사와 통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검찰은 당시 재판장이었던 김시철 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와의 교감 아래 무죄 취지의 판결문 초안을 작성하고 주심 판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 심증대로 재판을 진행했다고 봤다. 대법원 판단에 입각해 선고하는 통상적인 파기환송심과 달리 새 쟁점에 주목하거나, 사실관계를 다투는 1·2심보다 오래 심리해놓고도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교체될 때까지 결론 내리지 못한 것은 청와대와의 관계에서 이 재판을 활용하려 한 법원행정처의 기조에 따른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석연치 않았던 재판 과정에 대한 내막을 사법농단 의혹에서 발견한 셈이다. 검찰은 파기환송심 재판장인 김 부장판사를 증인으로 신청했고 격론 끝에 재판부는 이를 채택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증인신문 자체를 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2018년 검찰 수사가 한창일 때 검찰이 피의사실과 관련 없는 이메일을 위법하게 압수했다며 공개 비판하는 등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다. 그는 9월14일 재판부에 34쪽 분량의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법원행정처 내부에서 이뤄진 일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증인신문을 재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7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에 김 부장판사가 출석했다. 검사는 먼저 김 부장판사가 이 문건 작성에 관여했는지 집중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그는 문건 작성에 관여한 바 없다고 답했다. 이날 김 부장판사의 증인신문 내용이다.
“증인은 이 문건을 작성하거나 타인에 작성하게 한 사실이 있나요.”(검사)
“그런 사실이 없는데, 이 부분은 이 사건 해당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진술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문건의 3쪽을 봐주십시오. 재판장과 주심 판사가 통화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재판장은 증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문건 작성에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까.”
“네. 이 문건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 저는 증인의 지위에서 이 자리에서 진술하고 있는데요….”
그는 그러면서 종이봉투에 관련 대법원 판례와 자신의 입장을 서술한 문건 4부를 담아 와 재판부와 검사, 피고인 쪽에 건넸다. 재판부가 마다해 문건은 되돌려받았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위법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진행되는 증인신문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검사의 질문은 ‘언론 대응을 담당하는 공보판사에게 재판 내용을 설명하거나, 주변 판사들에게 조언을 얻었을지언정 문건과 같이 전반적 내용을 외부에 공유한 적은 없다’는 답변을 얻는 데 그쳤다. 김 부장판사는 석연치 않은 재판 과정 또한 합의 비공개 원칙을 들어 증언을 거부했다. 법원조직법(제65조)에 따르면, 심판의 합의는 공개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증인은 공모관계를 재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심(최현종 판사)은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공보관에게 그런 사정까지 설명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검사)
“개별 사건의 합의 내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보여, 합의 비공개 원칙에 따라 답변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습니다.”
“재판부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있다는 분위기 정도야 알려질 수 있겠지만, 어떤 점에서 뜻이 맞지 않는지 재판부가 알리지 않는 이상 알기 어려운 거 아닌가요.”
“이 사건에 관해서 묻는 거라면 합의 비공개 원칙에 따라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공모관계를 작위적으로 사실인정했다는 게 재판장 입장이라고 문건에 적혀 있습니다. 이게 재판장인 증인의 입장이었고 주심이 수긍하지 않았던 것 맞죠.”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별 사건의 내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라면 합의 비공개 원칙 때문에 제가 답변드리기 어렵습니다.”
검사는 합의 비공개 원칙은 증언 거부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받아쳤다. 공무상 비밀이라면 형사소송법(제147조)에 따라 소속 기관의 승낙을 받아 증인신문이 가능하며, 앞서 증인으로 나온 일부 판사들도 그 같은 방식으로 증인신문에 임했다고 맞섰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합의 비공개 원칙을 무기로 검찰의 증인신문을 ‘철벽 방어’했고, 결국 문제의 문건 작성자는 누구인지, 재판 진행 당시 법원행정처와 교감이 있었는지 실마리는 얻지 못한 채 증인신문은 3시간30분 만에 종료됐다.
또 다른 증인신문은 남아 있다. 주심 판사에 대한 증인신문은 취소됐지만, 원 전 원장 사건의 1심 재판장이었던 이범균 부장판사에 대한 신문은 11월27일 예정돼 있다.
검찰은 이 부장판사가 2015년 2월9일 항소심이 1심과 다르게 선고되자, 다음날 선고 내용을 비교 분석한 문건 ‘피고인 원세훈 등 국가정보원법,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 판결 분석’을 작성했고, 이 문건이 차례로 오후 5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오후 5시42분 홍승면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됐다고 본다. 검찰 주장대로라면, 항소심이 1심과 어긋나자 1심 재판부가 법원행정처 요청에 따라 직접 문건을 만들었고, 그 문건이 법원행정처는 물론 상고심을 담당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실까지 전달된 셈이다.
그러나 이 부장판사 또한 김 부장판사처럼 검찰의 증인신청이 부당하다며 9월15일 재판부에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불출석 의사를 강하게 드러낸 바 있다. 이 문건의 실제 작성자는 누구이고, 어떤 경위로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에 전달됐는지 증인신문을 통해 밝혀질 수 있을까?
고한솔 <한겨레21>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