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경기 고양시의 한 재활용 쓰레기 분리 업체에서 노동자들이 쓰레기 선별 작업을 하는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어느 날 퇴근 뒤 집에 도착했더니 택배 상자가 8개 정도 쌓여 있었다. 업무량이 가장 많은 날, 나는 틈틈이 온라인 쇼핑몰을 한 바퀴 돌면서 쇼핑을 한다. 집에서도 마라훠궈의 맛을 재현할 수 있는 밀키트와 겨울맞이 귤과 고구마, 구멍 난 고무장갑과 해진 수세미도 새로 샀더니 바지런하게도 이틀 안에 전부 배송이 된 것이다. 쌓인 택배 상자를 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택배 언박싱’이 이제 전혀 즐겁지 않다. 손가락 몇 번만 튕기면 결제까지 원스톱으로 이뤄지니 물건 사는 게 너무 쉬워졌다.
뭐든지 돈만 내면 편리해진 세상이다.
자, 이제 택배를 뜯어보자. 상자 안에 물건을 보호하기 위한 에어캡이 몇 겹이나 둘러져 있고, 냉동식품은 아이스팩이 몇 개나 들어가 있고 그 위에 에어캡 포장이 또 둘러져 있으며 스티로폼 상자에 친절히 넣어져 있다. 과일이나 채소류는 플라스틱 포장이 되어 있다. 이 모든 포장재는 사실 ‘알맹이’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어떤 손상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에어캡과 테이프로 꽁꽁 여며서 몇 겹이나 포장했다. 상자 뜯는 게 일상인지라, 현관에는 택배 언박싱용 커터칼도 준비되어 있다. 전문가처럼 요리조리 상자를 다 풀고 비닐과 플라스틱과 보냉제를 분리했는데도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쓰레기들을 이고 지고 여러 번 1층까지 업고 가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당신이 밥을 먹고 무엇을 하는지 말해주시오.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소.” 현대의 인간들에게는 이렇게 적용해야 맞을 것 같다. ‘당신이 버리는 쓰레기를 보여주십시오. 그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게요.’ 영화 속 형사들도 범인을 찾기 위해선 꼭 쓰레기를 뒤져본다. 쓰레기에는 필히 단서가 있다. 쓰레기는 사실 쓰임을 다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내 쓰레기통을 뒤져본 사람은 나에 대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흠, 이 사람은 오늘 뭘 먹었고 뭘 샀고, 요새 무엇에 빠져 있군.
이 또한 어느 날의 일이다. 바빠서 분리배출을 못 하고 현관에 쓰레기를 쌓아 뒀다. 밖에 나가야 하는데 문 앞을 쓰레기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는 마리오처럼 쓰레기를 건너뛰어 겨우 집 밖으로 탈출… 아니,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외출 뒤 다시 집으로 복귀할 때에는 어김없이 쓰레기들이 현관에서 나를 맞이해줄 테고…. 지난 이사 때, 혹시 쓸 일이 있을지 몰라 비닐봉지까지 버리지 못하고 모아 둔 나를 보고 어머니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신고해야겠다. 거기 나오는 쓰레기 모으는 여자가 여기 있네” 하며 혀를 끌끌 찼는데, 코로나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쓰레기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 되었다.
1인가구치고는 배달 식품을 자주 먹지 않는 편인데도 플라스틱 식기류는 꾸준히 쌓여만 가고, 그것들을 모아 버릴 때마다 생각한다. ‘혼자 사는데 이렇게 쓰레기가 많다니. 난 정말 지구에 유해한 인간이야.’ 때론 ‘코로나’가 훌륭한 변명거리가 된다. 코로나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코로나가 길어지는데 배달 식기가 많은 건 당연하지…. 나 역시 언제부턴가 내가 편하고 싶어서 하는 행위들에 코로나를 변명으로 이용했다. 퇴근길 마트에서 사도 충분한 작은 생필품을 귀찮아서 배달시키면서 ‘코로나가 기승인데 배달해야지. 배달료 추가도 안 되고 온라인이 더 싸잖아’ 이렇게 말이다.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요즘의 사고방식은 대개가 이런 식이다. 외출을 하지 않고 재택 기간이 길어지니 전기요금, 가스요금 등 집에 머무는 시간 대비 나가는 공과금이 증가했다. 지난해와 비교해봤을 때 여름 전기료는 두 배가 상승했다. 과거 1일 1회 집에서 밥을 먹었다면 요즘은 삼시세끼 집에서 챙겨 먹고, 홈카페를 차려 식음료도 집에서 해결한다. 더불어 음식물 쓰레기와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도 늘어났다. 나는 4인가족의 쓰레기 배출량이 정확히 어느 정도이고 그에 대비해 1인가구인 나의 쓰레기 배출량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1인가구는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게 버릇이 된다. ‘이번달 전기료가 얼마 나왔다’고 말하면 흔히 이런 타박을 듣는다. “야, 넌 혼자 살면서?”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버릴 때마다 속으로 자꾸만 되뇌게 된다. ‘나는 혼자 사는데 뭘 이렇게 많이 버리지?’
‘코로나 때문에 할 수 없지’와 ‘난 혼자 사는데 뭘 이렇게 많이 배출하지’ 등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정신승리와 죄책감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혼자 사는 집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냉난방기를 이용할 때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겨우 나 하나 좋자고 이렇게 에어컨을 켜도 되는 것일까, 이 쾌적한 공기를 누구라도 같이 누려야 덜 소비적인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기후위기와 탄소배출량과 코로나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관심사가 이쪽으로 쏠리자 차츰 쓰레기와 관련된 뉴스들이 눈에 띄게 됐다. 내가 배출한 쓰레기는 어디로 갈까. 이렇게 열심히 분리배출을 해봤자, 별 소용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으로 찾아본 뉴스들도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어떤 뉴스에서는 음식물이 조금만 묻어도 플라스틱 재활용이 안 되기 때문에 분리배출이 의미가 없다고 했고, 또 다른 뉴스에서는 사람들이 분리배출을 제대로 하지 않아 그 뒤에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고충을 겪는다고 보도한다.
인간이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쓰레기를 배출하게 되어 있다. 비교적 쓰레기 분리배출을 철저히 하는 편인데도 나 하나 이렇게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에 여행 갔을 때 그 나라 가정집 앞 쓰레기통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아니, 음식물 쓰레기와 잡초와 죽은 나무와 플라스틱 장난감이 분리도 안 된 채 섞여 있는 저 아수라장은 무엇인가. 대륙의 인간들이 저렇게 함부로 버리고 있는데 조그만 아시아의 1인가구인 내가 쓰레기를 줄인다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과학자
호프 자런의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는 1인이 만드는 변화가 지구에 큰 변화를 준다는 내용이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국민 13억명이 저마다 비슷한 희생을 감내한다면 전세계 전력 사용량의 25퍼센트를 줄이고 화석연료 사용과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각 가정의 사용량을 줄여봤자 어차피 공장에서 쓰는 산업용 전기량이 어마어마해서 아무 소용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아무 소용이 없다. 호프 자런은 ‘전기 절약에 관심이 없다면 육류 섭취, 음식 폐기물, 자동차 통근, 항공 여행, 살충제 사용 등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부분에서 시작해 점점 더 넓혀 나가자. 얼마나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는지 알게 된다면 분명 놀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사실 도시에 사는 사람이 자연 속에 사는 사람보다 더 환경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하는 책도 많다.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아스팔트와 빌딩숲이 실은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녹지에 둘러싸여 사는 것보다 고층건물에 모여 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게 더 친환경적이라는 것이다. 1인이 더 넓은 녹지를 차지할수록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장기간 이동해야 하고, 더 많은 탄소가 배출된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나는 환경주의자도 아니고 그보다는 소비주의자에 가까운 도시의 1인가구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덜 쓰는 것’이다. ‘저 가족은 나보다 많이 버리는데 뭐, 나는 혼자 살면서 이 정도면 양호한 거야.’ 이런 생각은 사실 세상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혼자 살든 여럿이 살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변화를 해야 한다. 죄책감과 허무주의 사이를 갈팡질팡하면서 조금씩은 쓰레기를 줄이고 친환경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도 지구에도 이로울 것이다. 이런 고민을 ‘시간이 많아 자아성찰을 자주 하는’ 혼자 사는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늘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