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사회심리학자가 지난 9일 오전 서울 관악구 한 카페에서,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심리 작용과 관련해 김은형 <한겨레> 논설위원과 인터뷰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최근 희극인 박지선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선한 웃음과 따뜻한 용기를 주던 고인의 죽음은 ‘코로나 블루’라는 집단 우울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 이상의 무력감과 좌절을 안겼다. 코로나로 인해 길게 이어지는 고립과 단절, 늘어나는 실업과 양극화 문제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지난달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올 한 해 의료기관을 찾는 우울증 환자만 백만명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싸우는 심리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사회심리학자 김태형씨는 “코로나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이전부터 높았던 한국인의 불안 수준이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2000년대 중반부터 <불안증폭사회><트라우마 한국사회><자살공화국>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병적 징후가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왔다. 최근작 <풍요중독사회>에서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촘촘한 위계들로 구성된 ‘다층적 위계사회’로 규정하면서 한국인의 삶을 “(위계에 의한) 학대를 피해 미친 듯이 위계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9일 서울 관악구 한 카페에서 김태형씨를 만나 코로나 시대 한국인의 불안과 젊은 세대가 직면한 심리적 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 시대에 자발적이거나 강요된 고립이 늘면서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생겼다. 실제 우울증 호소도 늘고 20~30대 여성의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통계도 나온다. 코로나 사태가 사람들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이런 재난 사태가 벌어지기 전의 한국 사회를 들여다봐야 한다. 가정이 화목하면 시련이 닥칠 때 더 응집한다. 반대로 불화가 심한 가정은 더 싸우게 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회 갈등이 봉합되고 국민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재난을 견딜 만한 힘이 있을 때 재난은 오히려 사회의 응집력을 높인다. 하지만 한국은 응집력이 없고 불안 수준이 높은 사회였기 때문에 코로나로 인해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고 증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코로나 이전에 요구됐던 개혁 과제를 코로나 이슈가 빨아들였다. 기존의 자살이나 빈곤 문제 등이 코로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가 사회 모순을 은폐하는 부작용도 있다.
―케이(K) 방역에 대한 자부심 등 한국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견지해온 각자도생의 삶이 옳은 것인지 회의가 생겨나는 건 분명하다. 이웃이 아프든 죽든 나와 무슨 상관이냐 하고 살아왔는데, 이웃이 아프면 나도 아플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 거다. 일사불란한 방역을 통해 한국인들의 집단주의적 성향도 다시 한번 확인됐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자살이나 산업재해 문제 같은 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모두에게 닥치는 재난, 평등한 재난 앞에서 가라앉아 있던 집단주의적 성향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는 미국처럼 돈 많고 의료기술이 발전되어 있어도 불평등한 시스템은 코로나를 해결할 수 없고, 우리처럼 평등한 의료시스템이 코로나 대처에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깨달음과도 연결된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평등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라고 본다.”
―코로나 블루에는 물리적 심리적 고립 외에도 코로나 이후 격심해진 사회 양극화 문제가 들어 있다. 당장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과 파산 직전의 영세 자영업자들, 과로사 위기의 택배·배달노동자들이 있는 한편, 골프장, 호화 리조트는 예약도 못 할 지경이고 연일 부동산, 주가 폭등 기사가 나온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훨씬 더 악화됐다. 감염의 위험은 평등한데 경제적으로는 부자에게는 기회를, 가난한 이에게는 고통을 준다. 양극화 문제가 코로나로 인해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미뤄졌던 사회 개혁이 더 이상 지체되면, 촛불항쟁 때와 같은 집단적 움직임이든 개개인의 좌절 속에서 극단적 선택이 늘어나든, 어떤 식으로든 폭발이 일어날 수 있는 지경이 됐다.”
김태형 사회심리학자가 지난 9일 오전 서울 관악구 한 카페에서,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심리 작용과 관련해 김은형 <한겨레> 논설위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여러 저서에서 병든 사회가 병든 마음을 만든다고 강조해왔다. 공정한 기준이 통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증오, 혐오 같은 병적 징후도 사라진다는 것인데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사태’나 ‘조국 사태’ 등을 통해 사회적 갈등의 화두가 된 ‘공정’을 사회심리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가?
“공정과 정의는 이미 2010년부터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됐다. 정의가 실현되려면 분배가 공정해야 하는데, 불공정한 분배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공정에 대한 요구가 확고해졌다. 하지만 사회가 이 문제의 해결을 미루다 보니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공정에 대한 해석이 갈라졌다. 그중 하나가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해석이다. 나는 능력주의 주장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적 기여를 더 많이 하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게 공정하다는 생각은 맞다. 문제는 보상이 돈으로만 생각되는 사회 풍토다. 사회적 존경이나 명예 같은 다양한 보상이 지니는 가치는 사라지고 돈만 보상의 척도가 되니까 오히려 경제적 차별을 옹호하는 식으로 변질된다. 성적 순서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갈망 속에서 촛불항쟁이 일어났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결과적으로 양극화는 심화됐고 자살률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특히 진보정권을 지지했던 젊은 층이 이른바 86세대에 대한 배신감 또는 실망감을 느끼면서 보수화되는 경향도 있지 않나?
“우리 사회의 불안 수준이 너무 높다. 불안에는 생존불안과 존중불안 두 가지가 있는데, 둘 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정도로 극도의 불안 상태를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 생존불안은 말 그대로 생존에 대한 불안인데, 당장 밥을 굶지 않아도 최저한의 생계비와 관련된 불안, 미래나 노후에 대한 불안 등이 너무 크다. 더 큰 문제는 존중불안이다. 무시당하지 않을까, 갑질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어마어마하다. 옛날에는 부자한테 무시를 당해도 보통 사람들끼리 무시하는 건 없었는데, 이제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도 월급 얼마 더 받고 덜 받는 데 따라 무시가 생겨났다. 30평 아파트 사는 사람은 40평 아파트 사는 사람한테 무시당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대형차로는 존중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외제차를 사야 한다. 이런 불안은 계급을 막론하고 전체 한국인이 감염되어 있다.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투기에 나서고 자식들이 무시당할까 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불안방어에 나선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촛불정권은 다를 거라는 기대가 결국 다 똑같다는 좌절로 이어졌다. 특히 생존불안이 너무 심한 젊은 층의 경우 이에 대한 배신감과 역편향으로 보수화되면서 트럼프 같은 인물의 등장을 기다릴 수도 있다고 본다.”
―양극화가 심해졌는데, 왜 보통 사람들끼리 갈등이 더 심해지는 건가?
“단순한 양극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사회가 됐다. 풍요사회가 되면 돈을 뿌릴 여력이 생긴다. 상위 1%가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면서 뿌리는 떡고물이 나머지 99%를 층층이 썰어놓았다. 옛날에는 부자와 보통 사람만 나뉘었는데 이제는 보통 사람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린다. 대학도 서울대가 연고대 무시하고 연고대가 서강대·성균관대를 무시하고, 이런 식으로 서열화될 뿐 아니라 같은 학교 안에서도 수시, 정시, 지역균형에 다 차별이 생기지 않나. ‘다층적 위계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내가 싸워야 하는 건 저 멀리 있는 이재용 부회장이나 상위 1%가 아니라 나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으면서 나를 낮게 보는 한두 층 위 사람들이다. 그래서 한두 층을 올라가기 위해 기를 쓴다. 지금 여기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같은 층 사람들끼리도 친할 수 없다. 위계 간 불화에 위계 내 불화까지 합쳐진 최악의 불화가 벌어진다. 이게 ‘21세기형 불화’다. 다들 돈 벌어서 한 층이라도 올라가 무시당하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며 같은 계층끼리의 연대도 사라지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으니, 사회의 응집력은 떨어지고 변화나 개선의 여지는 줄어든다. 이게 ‘풍요불화사회’로 전락한 한국 사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다.”
―지난해 출간한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에서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전지구적 현상과 한국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이번에 미국 대선은 극단주의의 폐해를 보여준 역사적 사례로 남을 거 같다. 왜 이처럼 극단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게 됐을까?
“극단주의의 본질은 배타성이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내 안전이 위협받을 때 발생한다. 안전하다고 느끼려면 생존불안과 존중불안이 사라져야 하는데 더 심해지기만 한다. 실패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사회안전망이 없고, 거의 개인 단위로 분열되어 서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불안이 줄어들지 않는 이상, 대테러 방지책을 아무리 강화하고 비판적인 교육을 한들 극단주의는 더 심해질 거라고 본다.”
김태형 사회심리학자가 지난 9일 오전 서울 관악구 한 카페에서,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심리 작용과 관련해 김은형 <한겨레> 논설위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세대론적으로 부모의 ‘조건부’ 사랑을 받은 80~90년대생의 심리적 위기를 우려했다. 20~30대는 ‘능력주의’로 다층적 위계사회를 더 밀어붙이고, 더 어린 10대는 엄마를 모욕하는 또래 문화를 형성할 정도로 관계의 파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보여주는 징후는 무엇일까?
“요즘 젊은 친구들한테 언제가 행복했냐고 물으면 거의 모두가 망설이지 않고 ‘없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 치이고 입시·취업 압박에 시달리면서 가정에서 박살 나고, 사회에서 ‘확인사살’ 당하는 세대다. 당연히 자존감이 떨어지고 신뢰·사랑 같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심리도 사라진다. 이런 세대가 주류가 된다는 건 사회가 근본적으로 매우 위험하게 바뀔 수 있다는 거다. 늦었지만 사회가 이들에게 지지와 존중의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너를 사랑한다, 도와줄 거야 이런 믿음을 줘야 한다.”
―부모가 주지 못하는 존중과 신뢰를 사회가 어떻게 줄 수 있나?
“부모의 교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불안을 양산하는데 어떤 부모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나. 아무리 격차를 줄이자고, 돈 중심의 사고를 바꾸자고 외쳐봐야 먹히지 않는다. 나는 기본소득제가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당장 생존불안이 줄어들고 파탄 지경의 관계가 호전될 수 있다. 생존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경제적 의존 관계가 생기고 여기서 지배-종속,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갑질이나 위계를 악용하는 성희롱 등에 저항하지 못하는 건, 그럴 경우 생존이 위태로워져서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불의에 저항할 수 있고 그 결과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갑을 관계를 벗어나면 존중불안도 줄어든다. 돈 때문에 무시당한다는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고, 사회병리라고 할 정도의 강박적인 배금주의도 약화될 수 있다. 사회적 소속감과 연대감도 강해진다. 쉽게 말하면 사회가 나를 사랑하고 지켜준다는 심리적 지지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제가 단순히 경제나 복지의 차원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코로나가 적어도 내년까지 이어진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코로나 블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개인들이 스스로 정신건강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어떤 재난을 알고 겪느냐 모르고 겪느냐는 이에 대한 심리적 방어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재난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느끼는 무력감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진다. 왜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고 어떻게 이런 재난을 예방할 수 있을까, 다음에 비슷한 일을 겪는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이런 과정들이 불안의 정도를 낮추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최대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게 좋다. 고립과 고독이 삶에서 가장 큰 문제다. 관계의 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정신건강은 물론이고 재난을 통해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도 만들어질 수 있다.”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