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미 삼아 채팅앱에 들어가서 모르는 오빠랑 대화했는데 제 말도 잘 들어주고 용돈도 보내줘서 저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보내달라는 사진들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성기 사진까지 보내달라고 해서 그건 거절하니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며 화를 냈어요.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한테 제 사진 보여줬을까 봐 걱정이 돼요. 저도 잘못이 있는 것 같아서 부모님한테는 말 못하겠어요.”
#2.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고민 상담을 위해 가장 이용자 수가 높은 채팅앱에 가입을 했죠. 대화방 이름을 ‘16/여/고민 상담해주실 분∼’이라고 설정했는데 1분 만에 어떤 사람이 들어왔어요. 연예기획사에서 일하는 30세 남자라고 하면서 본인이 데뷔시킨 연예인들에 대해서 소개했어요. 처음에는 의심스러웠지만 하는 말들을 듣다 보니 믿음이 가더라고요. 어느 날에는 저에게 데뷔를 시켜주겠다며 옷을 다 벗고 찍은 사진을 보내라고 했어요. 속는 셈 치고 사진을 보내줬는데 이튿날부터 연락이 안 되자 너무 불안해졌어요. 하지만 죄책감이 들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다가 일주일이 지난 뒤에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경찰서를 찾았어요. 그런데 채팅 앱은 가해자의 신원을 특정할 수가 없어서 대화 내용 캡처만으로는 수사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어딘가에 제 사진이 올라와 있을까 봐 너무 무서워요.“
지난해 11월 시민단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가 공개한 피해 상담 사례 중 일부다. 가해자가 채팅앱 등을 통해 피해여성과 신뢰관계를 형성한 뒤 신체 촬영물이나 조건만남을 요구하는 사례로 ‘온라인 그루밍’이라 부른다. 온라인 그루밍 가운데 특히 사회 경험이 부족하거나 미숙한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11일 한사성은 지난해 진행한 성폭력 피해 상담사례 452건(피해자 299명)의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를 보면, 2019년 온라인 그루밍 피해는 42건(9.3%)으로 2018년 26건과 비교해 1.5배 넘게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80%가량인 33건이 10대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불법촬영, 성적 이미지 합성 등 전체 디지털 성착취 피해자 가운데 1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6.1%지만 온라인 그루밍 피해로 좁히면 10대 피해자가 대부분인 것이다. 경제적·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폭력이나 협박이 없어 문제로 인식하지 못해 피해를 많이 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한사성은 “피해자의 ‘자발적 의지’를 악용한 폭력이 늘어났다”고 짚었다. ‘피해자 스스로 촬영물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 ‘피해자도 돈 벌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는 분석이다.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는 가해자 외에는 의지할 상대가 없는 경우가 많아 피해를 알리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경찰 신고를 결심해도 채팅앱 대다수가 익명을 보장하는 데다 한쪽이 퇴장하면 모든 대화 내용이 사라지게 돼 있어 가해자를 특정하기 쉽지 않다. 현행법이 ‘성 구매’를 목적으로 한 행위만 처벌 대상으로 삼는 등 처벌 제도가 미비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 6월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온라인에서의 성적 유인 행위를 구체화하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현재 상임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한편, 조사결과 ‘불법촬영’(82건·18.1%)과 ‘비동의 유포’(74건·16.4%) 등의 디지털 성착취 유형도 단체 대화방 성희롱 등의 ‘성적 괴롭힘’(86건·19.0%)에 이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다만 비동의 유포의 경우 2017년 48.5%, 2018년 22.2%에 이어 2019년에는 비중이 10%대로 낮아지는 등 촬영물을 이용한 피해 접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에 대해 한사성은 “(촬영물에 의한) 피해 심각성은 여전하지만 디지털성범자피해자지원센터 등 피해지원 체계를 갖춰나가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인식도 개선된 결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박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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