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제주 농부 오경대씨
“아이들도 있는데 한국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두고 떠나온 저를 용서해주세요.”
25일 노랗게 익은 감귤밭에 자리 잡은 제주 서귀포시 예래동 자택에서 만난 오경대(83)씨는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말했다. 지난 2016년 이탈리아에 이민 간 아들의 전화 한 통화에 가슴이 미어졌다. 오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1967년 구속돼 15년을 복역하고, 그 뒤 20년 가까이 보호관찰을 받았다. 지난해 재심 청구소송을 제기했던 오씨는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53년이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뒀던 이야기를 꺼내 세상에 알리면 내게 좋은 일이 있겠나, 나이도 있는데 재심해서 뭘 하나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이민을 떠난 아들이 연락 오고 주변에서 권유해 재심을 결심하게 됐지요.”
이 과정에서 오씨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전시공간인 ‘수상한집’ 변상철 대표를 만났고, 재심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씨는 1966년 6월16일 밤 후텁지근해 방문을 열고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마침 그날은 만삭의 아내가 처가에 간 날이었다. 오씨를 찾는 소리에 나가자 누군가 그의 손을 잡으며 “네가 경대냐”고 했다. 어릴 때 이후 만나지 않았던 8살 위 이복형이라고 했다. 다른 방에서 자던 어머니를 모셔온 뒤에야 이복형인 줄 알았다. 형은 “경대를 일본에 데리고 가서 구경시켜주고 좀 있다가 보내겠다”며 어머니한테 양복지 한 벌과 3만원을 줬다. 형은 거류민단증까지 보여줬다.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밀항할 때였다. 오씨는 “생활이 아주 어려워 일본으로 밀항하는 게 꿈이었다. 밀항하려면 큰 돈이 들어서 엄두가 나지 않을 때 그런 일이 생겼다”며 ‘운명’이라고 했다.
그날 밤 이복형을 따라 배를 탔다. 배 안 좁은 공간에 이복형과 눕자 밖에서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미 늦었다. 배가 도착한 곳은 북한 땅이었다. 사실상 납치된 것이다. 그곳에서 형과 크게 싸웠다. “일본으로 데려가겠다고 해놓고 어떻게 이렇게 하느냐. 당장 집으로 보내달라”며 단식하고 따졌다. 당시 폐디스토마에 감염됐던 오씨는 초대소 사람들 앞에서 “아픈 몸이다. 빨리 돌려보내지 않으면 죽는다”며 침을 뱉고 피를 토했다. ‘그 사람들’은 4박 5일 만에 오씨를 돌려보내며 “자수하면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협박했다.
66년 ‘일본행’ 말에 속아 북한에
‘아픈 몸이다’ 따져 5일 만에 돌아와
간첩 몰려 15년 복역 20년 보호관찰
중앙정보부 끌려가 모진 고문도
지난해 재심 소송해 20일 무죄 받아
외조부모 외숙모는 4·3때 학살당해
같은 해 6월22일 배를 탔던 곳으로 돌아와 어머니한테 사실을 털어놓았다. 오씨는 “나쁜 짓만 안 하면 된다”는 생각에 마을 인근 땅을 개간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9개월이 흐른 1967년 3월26일 오전 아침 식사를 하는데 사복 입은 남자 2명과 경찰관이 찾아와 오씨를 연행했다.
제주시내 중앙정보부의 한 사무실로 끌려간 오씨는 수갑이 채워진 채 각목으로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2명이 진술을 받고 2명은 고문했다. 그들은 오씨에게 “이복형이 어머니한테 준 3만원은 공작금이며, 라디오를 샀다. 간첩 교육을 받고 적지인 남한으로 침투했다”고 진술하도록 강요했다. 오씨는 “고문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오씨는 다시 서울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구타당한 뒤 구금됐다.
1967년 9월 1심에서 징역 15년을 받았고, 이듬해 형이 확정됐다. 그는 교도소에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체념했고, 다음에는 잡초 같은 인생이지만 사람답게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곳에서 침술을 배워 교도관들과 재소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오씨는 만기를 4개월 앞둔 1981년 8·15 특사로 출소했다. 오씨는 “사람들이 보는 눈빛이 가슴에 콕콕 화살처럼 박힐 것 같아서 고향에 오지 않으려고 하다가 어머니가 계셔서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출소 뒤 20여년 가까이 한 달에 한 번씩 동향을 보고했고, 농약 치러 밭에 갔다가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면 형사가 와서 지켜섰다. 숨을 쉴 수 없는 날들이었다.
오씨는 4·3 희생자 유족이다. 일제 강점기 마을 구장을 했고, 해방 직후 예래초등학교 기성회장으로 학교 건설에 기여한 아버지는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950년 1월 귀향했으나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예비검속돼 행방불명됐다. 외조부모와 외숙모는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1948년 12월 한꺼번에 학살됐다. 외숙모가 업고 간 갓난아기는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젖을 빨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들었다. 그 아기도 얼마 안 돼 죽었다. 오씨도 예래교 3학년 때 군인들이 초등학생들을 모아놓고 한 청년을 죽이라고 하는 현장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인생이 기막힌 날들의 연속이었어요. 구속된 뒤에는 영혼 없이 살았어요. ‘간첩’, ‘빨갱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죽은 듯이 살았어요. 판사님한테 늙은 부모를 두고 떠나는 자식의 심정을 고려해 달라고 했습니다. 무죄를 선고하는 순간 내 인생에 영혼이 깃드는 것 같았습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지난 20일 국가보안법 위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오경대씨. 허호준 기자
오경대씨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고문 받은 흔적을 설명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오경대씨. 허호준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