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전경. 서울성모병원 제공
“대학 안 가도 괜찮아.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아버지(53)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열흘 앞둔 딸에게 “시험을 안 봐도 된다”고 한사코 말렸다. 딸 허아무개(19)양이 지난달 23일 희귀병 ‘초중증 재생불량빈혈’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은 수능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아픈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며 의사의 꿈을 품어온 딸이었다. 입원한 뒤에도 침상 식탁 위에 독서대와 책을 놓고 공부하면서 수능을 준비하는 딸을 부모는 이기지 못했다. “혼자 두 걸음밖에 못 걸을 정도로 체력이 약해졌는데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요.” 여느 학생과 달리 ‘수능 도시락’ 대신 병원에서 제공하는 멸균식 점심을 먹어야 하는 허양은 부모가 건네준 초콜릿를 옆에 두고 1인 고사장에서 3일 수능을 무사히 치렀다.
허양은 수능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에 입원했다. 재생불량빈혈은 골수 내 조혈모세포 수가 감소해 적혈구 등 혈액세포 생산이 감소하는 병으로 빈혈이나 심각한 감염 등이 따라올 수 있다. 병원 쪽은 “초중증의 경우는 생명을 위협하는 매우 치명적인 경과를 보이므로 적극적인 치료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수능을 보겠다는 허양의 강한 의지는 서울시교육청과 병원을 움직였다. 허양을 위한 ‘1인 수능’ 환경을 마련하는 데 모두가 힘을 보탰다. 병원은 21층 특실을 제공해 허양이 시험을 치를 독립된 병실 공간을 제공했다. 감독관으로 참여하는 교육청 직원 4명이 시험을 준비하고 대기할 수 있는 공간도 회의실과 휴게실을 활용해 교육청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췄다. 또한 수능 중 이뤄지는 듣기평가를 위해 병원 내 방송을 차단하고 병실 앞 보안요원 2명이 시험시간 동안 주변을 통제했다. 수능을 보는 중 적혈구 생성 감소에 따른 허약감과 피로감, 호흡곤란에 따른 발열과 폐렴 등 위중한 합병증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병원은 응급조치를 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했다.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장(혈액내과 교수)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며 “현재 치료하고 있는 재생불량빈혈도 반드시 병원에서 좋은 성적으로 치료할 것이니 어려움을 헤쳐 나가자고 (허양에게) 응원했다”고 말했다. 병원은 “오후 5시께 허양이 무사히 수능을 잘 마쳤다. 중간에 응급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아버지 허씨는 ‘작은 바람’을 전했다. “딸이 당장은 건강하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희귀병을 이겨내 희귀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된다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가 되지 않을까요.”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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