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아무개(73)씨는 지난 21일 오후 2시께 한 증권사 소속 유명 금융전문가를 사칭하는 사람에게 인터넷뱅킹으로 2억원을 보냈다. 카카오톡 채널에 설정된 이름과 사진을 보고 해당 전문가인 줄 알고 대화를 나누다가 “해외 선물에 투자할 금액을 입금하라”는 말에 속았다. 이날 오후 5시께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씨는 경찰과 은행에 신고했다. 그러나 바로 계좌 지급정지 처리를 할 수 없었다. 현행법상 보이스피싱은 바로 계좌 지급정지 처리가 가능하지만, 이러한 사기는 계좌 지급정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서다.
28일 경찰과 금융기관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최근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주식·펀드·선물 등 재테크를 도와주겠다고 속인 뒤 돈만 받아 챙기는 사이버 사기가 크게 늘고 있다. 박씨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성동경찰서는 지난 14일에도 카카오톡 채팅을 통해 금 선물 투자라고 속여 6억5천만원을 가로챈 ㄱ씨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 성동경찰서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재테크를 가장한 이러한 수법의 사기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며 “전체 사이버 사기의 10~20% 정도”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금융투자업 관련 사이버 불법 금융 행위 신고 건수도 지난해 495건으로 전년(139건) 대비 3배 이상 늘었다.
실제로 카카오톡 채널에서 증권사 등을 검색하면, 유명 금융전문가의 사진과 이름을 도용한 상담 채널이 다수 존재한다. 누구나 채널을 만들 수 있는 오픈 플랫폼이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여기에 사기를 당할 경우 보이스피싱과 달리 계좌 지급정지가 바로 이뤄지지 않아 돈을 빨리 되찾기 어려울 수 있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계좌 지급정지 처리를 할 수 있는 ‘전기통신금융사기’를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 등을 가장한 행위는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받아 대신 투자를 해주는 것이나 중고 거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단순 변심에 따른 신고나 허위 신고로 인한 피해 등을 막기 위해 계좌 지급정지 대상을 제한해놓은 것인데, 신종 범죄에 법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재테크를 가장한 사기를 당할 경우 계좌 지급정지를 하려면, 경찰이 해당 계좌 은행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은행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보통 이 과정에 며칠이 걸려 이미 계좌에서 돈이 출금된 이후에야 지급정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씨 역시 경찰 신고 나흘 뒤인 지난 25일 오후 계좌 지급정지를 할 수 있었다. 이미 계좌 명의인이 100만원만 남기고 해당 계좌에 있던 금액 대부분을 인출한 뒤였다.
사기 수법이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경찰과 국회도 법 개정을 통해 계좌 지급정지 대상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 사기범죄가 늘고 있는 만큼, 경찰은 사이버 사기도 계좌 지급정지 대상에 포함되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국회와 협의하고 있다”며 “관계 부처와 적극 협의해나가겠다”고 밝혔다.
2019년 경찰이 연구용역을 맡긴 ‘인터넷 사기 이용 계좌 지급정지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도 “보이스피싱 범죄는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며 “‘재화의 공급 또는 용역의 제공 등을 가장한 행위는 제외한다’는 내용을 삭제하고 보완입법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지난달 22일 정희용 국민의힘 의원은 이 조항을 삭제하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바 있다.
다만 계좌 지급정지 대상을 늘리면 허위 신고 등으로 계좌 명의인이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계좌 지급정지 신청을 받았을 때 금융회사에서 재화의 공급이나 용역에 대해 사기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일방 주장에 따라 계좌 지급정지가 이뤄지면 선의의 계좌 명의인의 재산권 침해 등 전자금융거래의 법적 안정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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