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가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92년생 작가 이슬아는 지금 같은 세대 독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작가 중 한명이다. 기존의 등단 방식 등 권위와 관행의 경로를 따라가는 대신 2018년 ‘일간 이슬아’라는 구독형 연재를 시작해 매일 0시 독자를 직접 찾아가는 산문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작가의 말대로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 학자금 대출 상환이라는 주어진 과제를 풀기 위한 해결책이었고, 그를 지금까지 ‘연재노동자’로 자리매김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일간 이슬아’의 첫 시즌 연재를 끝낸 뒤 그는 ‘헤엄출판사’ 대표라는 명함을 하나 더 추가했고, 이곳에서 나온 책 5종이 지금까지 10만부 가까이 팔렸다. 그 밖에도 라디오 디제이, 뮤지션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오며 올해에는 전방위 예술가로 좀 더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고 있다. 지난 1일부터 ‘일간 이슬아’ 2021년 겨울호 연재를 재개한 이슬아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서교동 카페에서 만나 ‘책임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 늘 ‘투잡’이나 ‘쓰리잡’을 유지해왔다고 밝혔고, ‘일간 이슬아’ 시작과 함께 ‘연재노동자’로 활동하면서 라디오 디제이, 음악 활동까지 다양한 일을 해왔다. 현재 하는 일은 어떤 게 있나?
“메인은 연재를 하는 집필 작가이고 두번째는 ‘헤엄출판사’의 대표 일이다. 세번째는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글쓰기 교사 일이다. 지금은 도시형 대안학교에서 중고등 청소년을 가르치고 직접 모집한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도 가르친다. 집에서 가르치다가 코로나 확산 때문에 줌 수업을 하고 있다. <교육방송>(EBS) 라디오 ‘이스라디오’를 100회로 최근 마무리했다. 혼자, 그리고 동생 이찬희와 느슨한 팀으로 음악 작업도 비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새해의 변화 중 하나는 두루두루아티스트컴퍼니에 들어간 거다. 이 역시 ‘느슨한’ 소속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로서 하는 일은 모두 내가 꾸려나가고 영상, 화보, 음악 작업 등 다른 장르의 창작 활동을 할 때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팀이 생겼다.”
―2018년 ‘일간 이슬아’를 시작한 뒤 세번째 시즌을 진행 중이다. 시즌이 바뀌어갈수록 달라진 점은?
“첫해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쉼 없이 연재를 하다 몸이 ‘아작’ 나는 걸 경험한 뒤 다음해 시즌부터는 연재 주기를 줄이고 많이 쉬는 것으로 페이스 조절을 했다. 내용에서는 첫 시즌이 이슬아라는 사람의 화려한 재롱잔치였다면 두번째 시즌에는 인터뷰 코너가 들어온 게 가장 큰 변화다. 나와 내 가족, 내 친구, 내 애인 등 반경 1㎞ 안에 있던 글의 주제가 좀 더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확장된 셈이다. 이때의 연재 글 중 단행본 <깨끗한 존경>으로 묶은 정혜윤 피디, 김한민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유진목 시인, 김원영 변호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책으로 만난 스승들이라면 세번째 시즌에는 책에도 나오지 않고 에스엔에스(SNS)에도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27년간 이대목동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온 청소노동자 같은 분들이다.
―나와 주변에 대한 관심의 외연이 점차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묵묵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지만 마이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잘 드러나지 않는 중장년층 노동자를 만나고 싶었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코로나 유행 초기 때 대형병원 응급실들이 난리통이었는데 이 와중에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이곳을 계속 치우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이후 버섯 재배 농부나 인쇄소 노동자, 아파트 계단을 청소하는 나의 외할머니 등 오랫동안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온 분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1시즌 연재 때 세월호나 동물권, 공장식 축산 문제 등의 이야기를 하면 구독자가 많이 떨어져나간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떤가?
“조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면 떨어져나가는 독자들이 여전히 있긴 하다. 가볍고 재밌는 글을 읽고 싶은데 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느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모든 글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독자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게 ‘일간 이슬아’를 하면서 내가 해온 연습이기도 하다. 다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친절하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독자들과 ‘직거래’를 하다 보면 다양한 반응을 거르지 않고 듣는 게 장점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공격이나 비난을 대면해야 한다는 어려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정말 다양한 반응이 메일로 오는데 내가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질문에만 답한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피드백도 걸러 들을 수 있는 힘 같은 게 생긴 거 같다. 전혀 상처받지 않거나 눈치 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젊은 여성 작가가 아니라면 듣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진짜 많이 들은 것 같다. 대중예술계에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지가 소비되는 건 당연하지만, 가능하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개되고 활동하고 싶다. 납작하고 만만한 이미지로 소개되는 것을 거부해온 것 같다. 독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감사해하거나 죄송해하지 않는 태도를 체화해왔다.”
이슬아 작가가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대학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일간 이슬아’를 시작해 1시즌부터 성공했다. 연재의 목적은 첫 시즌에 달성했고 작가 이슬아를 찾는 곳도 많아졌으니 매일 마감을 강제하는 연재 노동은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계속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가장 크다. 단순한 집필이 아니라 기획부터 홍보까지 내가 매체의 기획자이고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수익률도 높고 내가 구축한 수익모델이라 계속 활용하는 측면도 크다. 청탁받아 쓰는 글은 불안정성이 있고, 초기에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수정되는 경험도 많이 했다. 내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고 싶은 만큼 쓸 수 있어 힘들더라도 계속해나가고 싶다.”
―직접 출판사까지 만들어서 책을 내는 이유도 같은가?
“분명 수익률 측면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다는 게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프리랜서로 7∼8년 살면서 디자인이나 사진, 영상 등 잔재주가 많아졌다. 조금만 더 힘쓰면 출판도 직접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겁 없이 달려들었던 거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일이 아주 많기도 했고 고되더라. 출판계에 작가와 출판사 말고도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있나, 왜 작가에게 인세가 10%밖에 안 돌아가는 구조인가 하는 수익 분배의 지형 같은 것도 알게 됐다. 지금은 내 출판사에서 직접 하는 작업과 다른 출판사와의 협업을 병행하고 있다. 타협 없이 만들고 싶은 책은 헤엄에서, 기성 출판사의 전문성에 도움을 받고 편집자와 상의하면서 만들고 싶은 책은 다른 출판사에서 하는 방식을 유지할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카페 알바부터 잡지사 막내 기자, 웹툰 작가, 누드모델, 글쓰기 강사 등 독립생활을 위해 쉼 없이 일을 해왔다.
“열아홉살부터 독립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건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경기도 외곽의 부모님 집에서 4시간 통학을 하기 힘들었고, 문화예술계에 발 들일 기회도 서울이 많았고. 서울에 산다는 건 월세를 감당해야 하는 삶이라 쉬지 않고 벌었다. 그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내 공간을 가진다는 게 좋았다. 쥐가 나오고 물이 새는 반지하에 살아도 늘 깔끔하게 내 공간을 꾸렸다. 거기서 모든 힘이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강단 있게 생계를 이어온 것 같다.”
―글에 부모님과 가족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엄마 이야기는 따로 책 한권을 묶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대기업 취직 등 보통의 부모들이 원하는 삶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어떤 영향을 받았나.
“어릴 때부터 뭘 하라, 하지 말아라 이런 게 전혀 없었다. 조건 없는 지지랄까, 아마 내가 작가로 성취를 못 했어도 부모님은 나를 지지해줄 거 같다. 이런 경우가 흔치는 않은 것 같다. 제일 큰 영향은 이분들이 블루칼라 노동자라는 점이다. 엄마는 식당, 마트 종업원 등을 하셨고 아버지도 공사 현장 노동이나 산업잠수사 같은 힘든 일을 계속 바꿔가며 하셨다. 생계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배웠다고 할까. 그리고 엄마, 아빠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묻는 걸 좋아한다. 20세기 초에 태어난 이분들이 살아온 삶이나 직업, 사랑 이런 게 근현대사와 직접 만나는 부분이 많지 않나. 할머니들의 이야기만 따로 수집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젊은 층의 ‘비혼의 물결’에서 드물게 출산이나 육아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썼다. 이런 것들이 일부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다른 지향으로 오해를 받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나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욕구가 있지만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비혼·비출산주의고, 그들의 낳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이해가 간다.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고 살아가다 보면 좋든 싫든 각자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자연스레 얻어지는 것 같다. 나 자신에게만 갇히지 않기 위한 공부가 페미니즘이기도 하고, 중요한 화두이지만 나는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포섭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싶다. 아카데믹한 공부를 하지 않은 우리 엄마나 아빠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설득하는. 또 페미니즘뿐 아니라 지구의 몇십년 뒤를 준비하는 환경과 동물권, 노동자와 장애인의 권리 등 확장성을 가지고 고민과 글쓰기의 지점을 넓혀가고 싶다.”
―어떤 식의 확장성인가?
“장애인과 페미니즘, 동물권 이슈 등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에서도 암컷 동물권 착취는 여성이 입는 피해와 비슷하고 공장식 축산은 가축들을 불구화, 장애화하는 작업이다. 멀쩡히 걸을 수 있는 소, 돼지, 닭의 팔다리를 못 쓰게 하고 어떤 장기는 고장나게 해서 신체를 불구화한다는 점에서 손상된 신체에 대한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장애인 문제와 페미니즘 역시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작가는 스피커가 있는 사람이니까 타인의 목소리를 집중해 경청하고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이슬아 작가가 2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후원회장도 맡고 있다. 어떻게 시작했고, 최근 장혜영 의원이 피해자가 된 정의당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장혜영 의원이 국회 들어가기 전에는 서로의 작업물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창작자 동료였다. 국회에 입성할 때도 누구보다 반가워했기 때문에 장 의원의 후원회장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말하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장 의원이 입장문을 올렸을 때 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아직 우리 사회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에 장혜영 의원이 풀어나간 방식은 다음 케이스의 해결에 중요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세대론적으로 본다면 ‘90년대생 여성’은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집단으로 보인다. 기성 정치의 진보성과는 다른 측면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실천력도 강하다. 작가 본인에게는 ‘90년대생 여성’이라는 소속감 같은 게 있는지.
“글 쓰는 또래 여자 친구들이 많지만 선배 여성 작가들과도 많이 교류하기 때문에 90년대생으로 묶이는 것에 대한 특별한 감흥은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중년이 되고 어떤 시대를 통과하고 난 다음에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비혼의 물결이나, 낙태죄 발언을 통해 재생산할 권리, 재생산을 거부할 권리 등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고 90년대생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글을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위로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공감이라는 단어로 묶이는 것도 불편하다고 했다. 자신의 글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나.
“내가 모르는 독자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내 글에 내가 생각하는 웃김과 아름다움과 서글픔을 넣을 뿐이다. 내가 바라는 건 약간 시트콤 같은 글이다. 시트콤에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등장인물들이 유머와 함께 계속 회복하지 않나. 그처럼 명랑하고 회복력 있는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