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내(홍제천)가 흐르는 가재울(서울 남·북가좌동) 가난한 동네에 1966년 4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이름은 좌원상가아파트,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다. 흔히 최초라고 알려진 세운상가아파트보다 1년 먼저 지어졌다. 좌원상가아파트는 사라호 태풍 이주민과 후암동 철거민이 정착했던 가재울과 잘 어울리는 인연이었나 보다. 이들 이주민이 일군 모래내시장이 서울 4대 시장으로 손꼽힐 정도로 확장되면서 좌원상가아파트도 함께 활기를 뽐냈다. 2000년대 들어 이 일대가 가재울 뉴타운으로 재개발되면서 모래내시장은 크게 쪼그라들었고, 좌원상가아파트도 세월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복잡한 소유 관계로 방치되다시피 한 좌원상가아파트는 지난해 정밀안전진단에서 가장 위험한 수준인 E등급을 받았다.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사업으로 선정돼 2025년 지하 6층, 지상 34층 주상복합으로 변신할 좌원상가아파트엔 가재울의 어떤 미래가 담길까.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 가재울은 드라마틱한 동네다. 모래내(홍제천)로 가로막힌 지형 때문에 예부터 가난했고, 가난했기에 수재민부터 철거민, 고향을 떠나 상경한 이들, 도시빈민 등 수많은 이주민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렇게 모인 이들이 모래내시장을 일구고 키웠다. 가재울뉴타운이 되면서도 이주민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기존 이주민과 어울려 살던 이전과 달리, 뉴타운 이주민은 살던 이들에게 자리를 잘 내주지 않았다. 55년 동안 이런 세월을 지켜본 좌원상가아파트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공공시행사로 해 공공성이 강한 형태로 재개발된다는 건 상징적이다. 좌원상가아파트와 모래내시장, 가재울뉴타운의 역사와 현재를 대비해 재개발의 의미를 짚었다.
“이거 재개발만 믿고 갖고 있었는데, 분양한다는 아파트가 왜 이렇게 작아요? 30평대, 40평대는 왜 안 만듭니까? 강남에선 여기보다 덜 오래된 아파트들도 넓은 평수로 조합원한테 분양하던데, 이럴 거면 뭐 하러 이런 데 집을 수십년씩 갖고 있었겠어요?”(주택 소유주)
“철거가 언제 되나요? 이렇게 재개발을 한다고 하면 살던 가구들은 갑자기 당황스러워서 어떡해요. 여기서 나가면 보증금 1천만원 빼서 어디 시골에 집을 구해야 하는데…. 그 돈으로 집이라도 구할 수 있게 철거 일정이라도 미리 알려주세요.”(세입자)
아파트를 가진 이와 가지지 못한 이의 간극은 컸다. 지난해 11월11일 오후 서울 남가좌동의 서대문구 사회적경제마을자치센터에서 열린 좌원상가아파트 재개발 관련 공청회에 모인 주택·상가 소유주들은 “평수가 얼마나 되나”, “용적률(800%)을 왜 더 안 올려주나”에 관심을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월세 세입자 가운데 질문을 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나마 마이크를 잡은 이는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될까 불안해할 뿐만 아니라, 재개발 계획의 기본 정보조차 부족해 보였다.
좌원상가아파트는 서울 서북부와 경기 고양시를 잇는 수색로 대로변 남가좌동 쪽에 자리잡은 4층짜리 건물이다. 수색로에 접한 건물 앞쪽의 너비(가로)가 41m, 모래내시장으로 향하는 건물 뒤쪽까지 깊이(세로)가 46m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건축물대장상 대지면적 2928㎡(약 886평)에 연면적이 8677㎡(약 2625평)에 이르는 큰 규모에 1~2층 상가, 3층 사무실과 아파트, 4층 아파트 등 점포 74개와 아파트 150호로 이루어져 있다. 수색로 건너 경의중앙선 가좌역을 마주하고 있는 이 건물은 얼핏 흔한 낡은 건물처럼 보이지만, ‘국내 최초 주상복합아파트’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초기 한국 주상복합으로 유명한 세운상가아파트(1967년)보다 1년 이른 1966년 준공돼 사용승인을 받았고, 낙원상가아파트(1969년)나 유진맨숀·상가(1970년)보다도 먼저 지어졌다.
55년 세월을 버텨온 좌원상가아파트는 지난해 정밀안전진단에서 E등급을 받았다. E등급은 건물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 즉각 사용을 금지하고 개축을 해야 하는 수준으로, 언제 내려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안전상 문제가 크다. 이 때문에 좌원상가아파트 재건축은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사업’으로 선정됐고, 현재 서울시 재정비위원회에서 ‘가재울정비촉진지구 지구단위계획’(재정비촉진계획) 변경안을 심의하고 있다. 변경안이 통과돼 고시되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공시행사를 맡아 재건축을 추진하게 된다. 서대문구청은 이르면 3~4월께 변경안이 고시돼 올해 상반기에는 재개발 절차가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계획대로 내년 말 착공해 2025년 말 완공되면 이 낡은 건물은 지하 6층, 지상 34층, 연면적 3만8035㎡(약 1만1500평)의 고층 주상복합으로 변신하게 된다. 2층까지가 임대와 분양이 더해진 상가고, 그 위는 아파트(분양 166가구, 임대 73가구)와 오피스텔(70호)로 구성된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공공시행사로 자금을 대는 대신, 2층에 만드는 공공체육시설 등 생활편의시설은 서울시에 기부채납할 예정이다.
국내 최초 주상복합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도 좌원상가아파트는 낯설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짓고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인 김수근이 설계한 세운상가아파트, 고급 주상복합으로 유명했던 유진맨숀·상가에 비하면 좌원상가아파트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여기엔 이 건물이 들어선 가재울의 역사가 깔려 있다.
1966년 준공된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좌원상가아파트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지난해 정밀안전진단에서 가장 위험한 수준인 E등급을 받아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통한 공공적 성격의 재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다. 양복점, 기원, 문구점, 콜라텍 등이 자리한 2층.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가재울은 남·북가좌동 일대를 일컫는 옛 이름이다. 1949년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진 경기 고양군 연희면 가좌리였다. 가재울이라는 이름은 북한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흘러드는 홍제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제천에 가재가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설, 홍제천 가장자리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는 설 등이 있지만 명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홍제천의 옛 이름은 모래내·사천(沙川)으로, 하천에 모래가 많이 쌓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좌원상가아파트 뒤쪽의 모래내시장, 홍제천 좌우 남가좌동과 연희동을 잇는 다리 사천교는 모두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가재울은 한양도성과 멀지 않지만 홍제천으로 가로막혀 교통이 불편했다. 이 때문인지 이곳엔 오랫동안 가난했던 이주민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1663년 ‘강희2년 계묘식년 한성부북부장호적’엔 가재울에 사는 이들의 79%가 노비라고 기록돼 있다. 17세기 후반, 한강 광나루~양화진(합정) 구간을 일컫는 경강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인근인 가재울에도 전국 곳곳의 빈민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18~19세기엔 한성부가 확대돼 근교농업지로 발전하면서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이가 늘어났다.
한국전쟁 이후 가재울 인구가 증가한 것은 역대 최악의 태풍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1959년 ‘사라’호와 관련이 있다. 당시 정부는 사라호로 이재민이 된 서울 이촌동 주민 2200여명을 남가좌동 소나무숲 언덕으로 이주시켰다. 가재울뉴타운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서울역사박물관이 이 지역의 생활문화 자료를 모아 2008년 펴낸 <가재울: 그리운 가재울>(이하 <가재울>)에는 트럭에 실려가 그 숲속에 군용 천막과 무허가 판자촌을 짓고 살았던 수재민들의 증언이 채록돼 있다. “삼성아파트(래미안 남가좌 2차, 가재울뉴타운 3구역 근처) 지은 자리가 하꼬방 판자로 된 걸로 방 하나, 부엌 하나 만들어놓고 사는 말할 수도 없는 동네였어. 나 오기 전부터 집도 아닌 집을 지어서 살고 있었어. 낮에는 못 하게 하니까, 밤에 벽돌 몇 개 쌓아놓고 나무때기 걸쳐서 지어놓고, 그러면 못 쫓아낸다(고 하니), 하룻저녁에 집 한 채 지어서 살았던 집이야.”(이경숙씨) 근처에 공동묘지도 있어, 집을 지으려 땅을 파다 유골을 발견했다는 회고도 있다.
이듬해엔 철로를 확장하면서 삶터를 잃은 서울 후암동 철거민들이 남가좌동 홍제천 지류인 앞냇물 제방 쪽으로 이주했다. ‘대부둑’이라 부르던 제방을 따라, 당시 서울시는 도심지 철거민 정착촌을 만들었다. 한 동에 5평씩 12가구가 살도록 한 공동주택이었다. 이곳은 현재 가재울뉴타운의 ‘대장주’로 불리는 4구역 디엠시(DMC) 파크뷰자이 일대로 변신했다. 앞냇물도, 철거민촌을 정비해 1981년 지었던 2동짜리 백조아파트도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가재울 옛 지도를 펴놓고 변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홍기윤 모래내·서중 양대시장 재개발조합 총무이사. 11대째 가재울을 지킨 이 동네 토박이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가재울과 시내를 가로막고 있던 홍제천에도 변화가 생겼다. 1962년 사천교가 개통하면서 “무거운 짐을 이고 물을 건너거나 위험한 철교를 건너지 않아도 되면서 가재울은 비로소 서울의 외곽이나마 서울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다.(<가재울>) 11대째 가재울을 지키고 있는 화가 홍기윤(69, 모래내·서중 양대시장 재개발조합 총무이사)씨는 “예전엔 신촌이나 서울역 쪽으로 가려면 홍제천 물을 건너거나, 철도 사고를 무릅쓰고 경의중앙선 철로로 다녔다. 그땐 열차에 부딪쳐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도 많이 났는데, 사천교가 생기면서 달라졌다”고 말했다.
가좌역 맞은편, 쓰레기 매립지와 논밭이 1966년 모래내시장으로 탈바꿈하면서 가재울은 더욱 북적거리게 된다. 1992년 <서대문구지>를 보면, 1960년 7495명이던 남·북가좌동 인구는 1965년 2만8553명, 1970년 6만3852명, 1975년 8만1668명으로 급증한다. 두 차례 대규모 이주와 사천교 개통, 모래내시장을 계기로 사람이 모여든 것이다.
특히 좌원상가아파트와 같은 해에 한복집, 기름집, 방앗간 등 점포 103곳으로 문을 연 모래내시장은 가재울의 핵심이었다. 수색로와 사천교를 따라 경기 고양시 능곡·일산 일대 농산물이 모래내시장으로 내려와 종로·여의도까지 팔려나갔다. 간이역이던 가좌역이 1969년 열차가 서는 보통역으로 승격되면서 모래내시장은 날개를 달았다. 신촌이나 서울역까지 가서 농산물을 팔던 능곡·일산 사람들이 가좌역에 내려 보따리를 풀었다. 포목, 주단, 한복, 이불도 불티나게 거래됐다. 모래내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서중시장, 삼거리시장, 오금석시장 등 주변 골목으로 이름을 달리한 시장이 확산됐다. 통상 이를 통틀어 모래내시장으로 불렀는데, 가장 커졌을 땐 현재 가재울뉴타운 4구역 일대까지 시장이 이어졌다고 한다. 서울 서북부와 경기 고양시의 중심 상권으로 자리잡으면서 모래내시장은 한때 서울 4대 시장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모래내시장이 활성화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먹고살 길을 찾아 떠난 이들이 가재울에 모였다. 시장 안 상가는 1층 가게, 2층 살림집 형태로 지어진 게 많았다. 시장이 아니어도, 아현동 셋방살이 할 돈이면 가재울에 작은 집을 살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이 일대 집값은 쌌다. 그조차 구할 수 없던 이들은, 툭하면 범람하던 홍제천 옆에 일제강점기 때 쌓은 제방을 따라 빼곡히 늘어섰던 판잣집에 들어갔다. 고추방앗간을 운영했던 강춘송씨의 얘기다. “친구하고 다니다가 모래내시장 쪽이 새로 개발됐으니까 와보라고(하는 얘기를 들었다). 황톳길로 시골길처럼 왔는데, 노점에 포장 이렇게 쳐놓고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전부 몸뚱이 하나만 갖고 와서(장사하면서 살더라). 여기서는 (장사를 해볼) 자신이 있더라.”(<가재울>)
가재울 이주민들이 일군 모래내시장은 한때 서울의 4대 시장으로 꼽힐 만큼 번성했지만 도시개발과 뉴타운 등의 영향으로 지금은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까 말까 한 두개의 골목으로 쪼그라들었다. 수색로에서 이어지는 골목에 줄지어 선 점포들이 시장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좌원상가아파트에서 맞춤양복점을 하고 있는 이강현(73)씨도 모래내시장이 번성하던 그 무렵 가재울에 자리를 잡았다. 고향인 충남 서천군에서 스무살 때 상경해 명동 양복점에서 재단 일을 배웠다. 부유층이 맞춰 입는 양복이니,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1년만 일하면 팁만으로도 집을 산다던 시절이었다. “내 사업을 해야겠다” 싶은 통에, 먼저 가재울에 양복점을 연 친구한테서 장사가 잘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23살 때인 1971년, 좌원상가아파트에 세를 얻어 가게를 열고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모래내시장이라고 하면 옛날엔 진짜 알아줬다. 직원 열댓명을 두고 3층에 따로 공장까지 운영했는데도 기술자가 없어서 일을 못할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그렇게 돈을 벌어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아 키웠다. 점포도 하나둘씩 사서 세를 주고, 집도 방 4개짜리로 늘렸다.
좌원상가아파트에 거주하며 2층에서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강현씨. 이곳에서 아들 셋을 낳아 기르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1971년 몇몇 일간지에 실린 좌원상가아파트 분양 광고를 보면 ‘생활의 근대화’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에 걸맞게 ‘냉·온수 상시 사용, 텔레비 종합 안테나, 씽크대, 자동 교환전화, 세면기, 양변기, 샤워기, 자동 화재경보기’ 등을 갖추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강현씨는 “내가 처음 이 건물에 왔을 땐 지금 한의원 자리가 다방이었는데 거기 전화교환원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다들 연탄을 때던 시절에 좌원상가아파트는 기름보일러를 갖춘 곳이기도 했다.
주거공간인 3~4층 아파트는 6~8평형 원룸과 16·18·25평형 ‘고급 맨션아파트’가 섞여 있었다. 다양한 집의 크기만큼, 1인 가구부터 이 상가나 모래내시장의 상인·교사·군인·의사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좋게 보면 소셜믹스, 나쁘게 보면 양극화가 한 건물 안에서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두 집 사이 벽을 터 하나로 합친 집도 적지 않아, 이보다 집 크기가 더 다양해졌다.
한 가지 이상한 건 1966년 준공된 건물의 분양 광고가 왜 1971년에 났느냐다. 여러 배경이 있겠지만,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당시만 해도 아파트가 별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1958년 대한주택영단(대한주택공사의 전신. 대한주택공사는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함께 한국토지주택공사로 통합됐다)이 지은 서울 종암동 종암아파트를 필두로, 정부는 도시 인구 과밀로 인한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아파트 건설을 정책적으로 추진했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지 다섯달 만에 착공해 1년 만에 지은 서울 마포아파트 준공식에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본 아파트가 혁명한국의 한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주택 부족 해소를 위한 아파트 건설은 정부의 절실한 과제였다.
1971년 7월21일 <경향신문>에 실린 좌원상가아파트 분양 광고. 신문 갈무리
하지만 1960년대 한국인들이 원하는 집은 ‘마당 딸린 단독주택’이었다. 김장독 묻을 곳도 없는데다, 서민을 대상으로 좁은 면적으로 지은 집이 아파트라는 인식이 강했던 탓이다. 1970년, 준공된 지 석달여 만에 무너져내린 와우아파트 사고로 아파트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더욱 강해졌다. 1971년 이효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진행한 연구를 보면, 서울 아파트 거주에 만족한다는 사람은 응답자의 2%도 채 되지 않았다. 좌원상가아파트라고 이런 상황을 피해 가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홍기윤씨는 “이 동네에 넓게 집 지을 데가 얼마나 많았는데 굳이 거길 들어갔겠나. 거기 들어갈 돈이면 단독주택을 짓고 살지. 사람들이 아파트엔 관심이 없어서 분양도 잘 안됐다”고 전했다.
아파트가 중산층 이상의 주거 형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건 1971년 서울 동부이촌동, 1974년 서울 반포동 등에 고급·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후다. 한강변을 따라 형성된 강남 일대와 잠실 아파트 단지엔 생활편의시설도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아파트 단지와 일반주택가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전선이 땅에 묻혀 있느냐 시선을 가로막느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주거 환경의 격차는 점점 커졌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도시 미화’ 차원에서 아파트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아파트 건설 붐이 일고 부동산시장이 달아올라 투기까지 일어나면서 1980년대 후반 들어 아파트 가격은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1981년 350만원으로 좌원상가아파트 3층 안쪽에 집을 사서 들어온 전숙희(72)씨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 막내가 돌 때 여기 이사 왔는데, 그때만 해도 이 아파트에 같이 애 키우는 내 또래들이 많았다. 아이들 소리로 시끌벅적했고, 점심땐 수제비라도 해서 복도에 내가 이웃들끼리 나눠 먹으면서 재밌게 살았다. 큰 집에 살든 작은 집에 살든 다 섞여 놀았지. 여름엔 가운데 있는 집도 맞바람이 칠 수 있게 같은 줄에 있는 집들이 다 문을 열어놓기도 했다. 더우니까 밤엔 옥상에 올라가서 돗자리 깔고 자기도 하고.(좌원상가아파트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 때문에 대체로 가로세로로 3개씩 난 복도를 사이에 두고 집이나 상가가 바둑판처럼 배치돼 있다. 이 때문에 안쪽은 창이 없어 어둡고 환기가 잘 안된다.) 그러다 88올림픽 지나고 많이들 이사 나갔다. 그때는 하룻밤 지나면 집값이 오를 때였는데, 주로 사우디 같은 외국에서 돈을 벌어 오거나 건축 일 하면서 수입이 늘어난 사람들이 여기를 떠났다.” 가재울에서 열심히 목돈을 마련한 이들이 더 좋은 아파트를 찾아 떠나곤 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지역과 달리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가재울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그리 들어서지 않았다. 밀집한 주택들은 노후화했다. 1992년 일산 새도시가 개발되면서는 모래내시장으로 오던 농산물이 줄고, 시장도 축소되기 시작했다. 홍기윤씨는 “급속도로 팽창했던 모래내시장이 그 무렵부터 쪼그라들게 됐다. 나쁜 자재로 날림공사를 한 시장 건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판매하는 물건이 줄어드니 손님도 줄어 시장이 슬럼화해, 1995년부터 모래내시장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그래도 진척이 없던 재개발은 2003년 가재울 일대 107만7760㎡(약 32만6천평)가 2차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속도가 붙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주민들이 조리용 등으로 이용하는 엘피지 가스통이 옥상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 뒤로 가재울 뉴타운으로 생긴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1~8구역과 모래내·서중 양대시장 정비사업지구로 이뤄진 가재울뉴타운은 현재 6구역까지 입주가 끝났다. 7구역은 조합설립 인가 절차를 밟는 중이고, 관리처분 인가를 받은 8구역은 기존 건물 철거를 추진하고 있다. 모래내·서중시장 쪽은 내년 입주를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서대문구청과 최선 서울시의원을 통해 서울시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뉴타운이 가재울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가 드러난다. 1980년 이후 2007년까지 10만~11만명 규모를 유지하던 가재울 인구는 2008년 8만3934명으로 갑자기 훅 줄어든다. 그해 전출이 1만8248건(1만4521가구)으로 전입 9908건(7346가구)보다 두배 가까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체 200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은 가재울뉴타운 3·4구역의 주민 이주와 기존 주택 철거가 시작된 때다. 남가좌1동이 4300가구 규모의 4구역, 북가좌1동이 3300가구 규모의 3구역으로 부지가 넓고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이어서 원래 살던 이들의 대규모 전출이 일어난 것이다. 북가좌2동 1구역과 남가좌2동 2구역이 2008년과 2009년 각각 준공돼 주민들이 입주했지만, 가구 수가 360여개와 470여개로 적어, 가재울의 인구 변화에 큰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
전입 인구가 다시 늘어난 건 3구역 입주가 있었던 2012~2013년, 4구역 입주가 이뤄진 2015~2016년이다. 북가좌1동 인구는 2012년 1만6927명(6187가구), 2013년 1만9709명(7127가구)으로 증가했다. 남가좌1동도 2015년 1만1023명(4089가구), 2016년 1만6538명(5854가구)으로 사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지만 뉴타운 입주가 완료됐는데도 이전 인구 수준은 회복하지 못했다. 넓은 집과 쾌적한 환경을 만들려고 같은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가구 수 자체를 줄인 결과다. 애초부터 뉴타운이라는 계획에 ‘원주민 정착’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원주민이 떠난 자리, 인구는 줄었지만 가재울의 ‘재력’은 이전보다 풍부해졌다. 최선 서울시의원을 통해 서울시에서 받은 최근 10년간 서대문구 재산세 현황을 보면, 2010년 28억9300만원이던 남·북가좌동 재산세는 지난해 68억100만원으로 2.5배 가까이 늘었다. 그동안 집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뉴타운이 하나둘 완성되면서 ‘비싼 집’이 동네에 자리잡은 영향이 특히 크다. 가령 3구역 입주 이듬해인 2013년 북가좌1동 재산세는 9억3300만원으로 그 전해(5억7300만원)보다 크게 늘었다. 4구역이 입주한 남가좌1동에서도 똑같은 흐름이 나타나, 2015년 7억7500만원이던 재산세가 2016년 12억4900만원으로 증가했다.
매끈하고 윤택해진 동네에서 좌원상가아파트와 흔적만 남다시피 한 모래내시장의 풍경은 매우 이질적이다. 1970년대 수색로를 확장하면서 도로를 높이는 바람에, 좌원상가아파트는 인도에서 갑자기 푹 꺼진 것처럼 보인다. 당시 졸지에 반지하가 된 탓에 1층 상가는 비만 오면 물난리를 겪었다. 이강현씨는 “나도 1층에 점포가 있었는데, 길에 배수로가 잘 안돼 있던 시절인데다 비가 오면 홍제천도 범람해 도로보다 낮은 1층 점포들은 물이 차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좌원상가아파트의 화장실이 없는 집에 사는 이들이 이용하는 3층 공동화장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이제 좌원상가아파트에 물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해도, 도시가스도 들지 않는다. 창도, 중정도 없는 건물 안쪽은 대낮에도 어둑어둑하고, 천장엔 각종 배관과 전선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틀어진 나무문부터 디지털 도어록이 달린 철문까지 어느 한 집도 똑같은 문이 없다. 을씨년스러움을 넘어 서늘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분위기 탓에 이곳은 <무뢰한>, <아수라> 같은 누아르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생활하기 안락한 곳은 아니라는 얘기다. 몇차례 민간 재개발 얘기도 있었지만, 복잡한 소유관계와 교통영향평가 부적합 가능성 등의 이유로 무산됐다. 그러면서 건물은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윤주화(56)씨는 2007년 보증금 5천만원에 전세를 얻어 이곳에 들어왔다. 좌원상가아파트엔 기름값이 무서워 연탄보일러로 개조한 집이 제법 있는데, 윤씨가 사는 집도 그런 곳이다. 처음엔 연탄을 땠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다. 방바닥엔 전기장판을 깔고, 음식은 엘피지(LPG) 가스로 해결한다. 목욕은 동네 목욕탕에서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마저 쉽지 않아져 요즘은 가스불에 물을 데워 쓴다. 요즘 같은 겨울엔 특히 더 불편하다. 윤씨 집 옆에, 화장실이 없는 사무실을 집으로 개조한 곳에 사는 이들이 이용하는 공동화장실이 있는데 툭하면 수도가 동파돼 복도 전체에 물이 넘쳐 얼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 건 “재개발되면 임대아파트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식당 일을 하고 있고, 같이 사는 딸도 돈을 벌어 보증금을 마련하는 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그는 “이 건물에 기초생활수급자도 많이 사는데, 어쨌든 나는 임대아파트라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분들은 여기서 나가면 정말 갈 데가 없어 어떡하나 싶다”고 말했다.
좌원상가아파트 세입자 윤주화씨. 이곳이 재개발되면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서대문구청은 좌원상가아파트 거주자가 118가구(124명)이고, 가옥주 10가구를 제외한 108가구가 세입자라고 파악하고 있다. 세입자는 주로 고령의 1인 가구로 기초생활수급자 등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많다. 신동호 서대문구청 가좌도시재생팀장은 “거기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한테 임대주택 우선권을 주고, 상가 세입자를 위한 공공임대 상가를 별도로 만들어 이들이 최대한 쫓겨나지 않는 여건을 만들려고 하는 게 이번 재개발의 취지”라며 “일반적인 공영개발에선 찾기 어려운 형태”라고 설명했다. 뉴타운 재개발과 달리, 살던 곳에 계속 살게 할 장치가 준비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보증금 100만~300만원에 임대료 10만~20만원을 내고 있는 이들이 재개발 이후 보증금이 수천만~1억원대에 이르기 십상인 임대아파트에 과연 들어갈 수 있을까?
소유자들의 불만도 없지 않다. 이 건물과 토지에 지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소유자는 264명이다. 개발이익을 노려 산 사람도 있고, 이 건물에만 네댓채씩 집을 가진 이도 있다. 3~4층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는 김강하(가명·70)씨는 “상업지구에 이 정도로 면적이 넓은 곳이 이 일대에 없는데, 큰 상권이 형성될 수 있도록 상가를 대폭 늘려야 된다. 지금 계획처럼 상가를 2층까지만 만들면 집값이 오를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씨 같은 이들은 과연 ‘투자’의 과실을 기대만큼 거둘 수 있을까?
두 질문에 답을 내긴 쉽지 않다. 하지만 좌원상가아파트 재개발이 평화롭고 인간적으로 이뤄져 가재울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정부와 서울시,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반드시 찾아야 할 답이다.
※참고도서: <가재울: 그리운 가재울>(서울역사박물관), <가재울: 삶 그리고 이야기>(서울역사박물관), <가장 도시적인 삶>(황두진 지음, 반비 펴냄), <아파트 공화국>(발레리 줄레조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아파트에 미치다-현대 한국의 주거사회학>(전상인 지음, 이숲 펴냄)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