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식구 신발로 가득 찬 신발장. 대한적십자사 제공.
“네가 이렇게 (대답)하니까 너희 가족들이 다 장애지.”
둘째 딸 박지희(20·이하 모두 가명)씨가 5층에 사는 윗집 할머니에게 직접 들은 말을 전하며 두 손을 꽉 쥐었다. 할머니는 집에 빨래를 널 공간이 부족해 옥상으로 가는 박씨를 붙잡고선 “왜 새벽에 몰래 빨래를 널러 올라가 주변을 시끄럽게 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새벽에 옥상으로 간 적이 없다”는 말에도 할머니는 가족과 관련한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6월 이사 온 지 한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희씨네 가족은 지난해 5월 서울 중랑구의 한 빌라로 이사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아동주거빈곤가구 매입임대주택’(임대주택)에 선정돼 보증금 부담을 덜었다. “드디어 좀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니 정말 좋았죠.” 아버지 박영길(44)씨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부부는 9남매를 낳았다. 아홉 자녀 중 네명이 자폐성 장애가 있다. 임대주택에 선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해서 독립한 맏아들을 제외한 온 가족이 33㎡(10평) 남짓한 좁은 지하방에서 생활해왔다. 햇볕이 잘 드는 새로운 보금자리는 79㎡(24평)라 자폐성 장애가 있어 부부의 ‘아픈 손가락’이 된 셋째 지수(18)양과 일곱째 준수(13)군, 여덟째 영수(11)군, 막내 은수(7)양에게도 더없이 좋은 공간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박씨의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코로나19로 다들 예민한 시기에 가족이 많은 것은 ‘다복’이 아니라 ‘흠’이 됐다.
박씨 가족은 1층이 주차장인 필로티 구조 빌라 3층에 입주했는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웃과 층간소음 문제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게 됐고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자, 아랫집과 윗집으로부터 “소음이 심하다”는 민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집에 열 식구가 모여 살다 보니 빌라 이웃들의 시선이 처음부터 곱지는 않았다.
박씨가 집을 오가며 이웃을 만날 때마다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어 조금 시끄러울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당부했지만, 매번 굳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층간소음을 줄이기 위해 두꺼운 매트를 온 집안에 깔아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자폐성 장애 2급인 7살 은수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졌다. “막내는 집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안 그러면 몸부림치고 소리를 지르거든요. 다른 아이들은 크면서 증세가 덜한데, 자기 고집이 워낙 강해서 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네요.” 최근 큰 수술을 받아 아이들을 통제하기가 버거운 어머니 강순희(44)씨는 한숨을 쉬었다.
주민센터에서 이웃들을 모아 회의를 해보았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 뒤로도 박씨 가족과 이웃들은 빨래 너는 공간부터 음식물 쓰레기 처리까지 사사건건 부딪쳤다.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은 박씨 가족이 빌라를 떠나는 방법뿐이었다. “다른 집에서 소음이 나도 우리 집에서 났다고 주장하는 이웃들이 많지만 대응하면 또 싸우니까 저희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조금의 이해를 바라는 건데….”(박지희)
박씨 아이들은 개인 공간이 없기에 주로 거실에서 생활한다. 대한적십자사 제공.
박씨 부부는 이웃의 따가운 눈초리에 익숙하다. 부부는 첫째 준후(23)씨가 태어난 뒤로 이사를 18번이나 했다. 자폐성 장애가 1급인 셋째 지수가 태어난 뒤로는 집을 더 자주 옮겨야만 했다. 아이가 많은데 장애인까지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공인중개사와 집주인은 “계약이 어렵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가 많다고 하면 대부분 거절했어요. 그 와중에 임대인이 허락하는 집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계약했어요. 선택권이 없었거든요. 이사 비용만 해도 정말 돈이 많이 들었어요.” 박씨가 허탈하게 웃었다.
어렵사리 보금자리를 구해도 이웃이 아동학대로 신고해 난감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머리를 박거나 우는 등의 행동을 해 이를 지켜본 이웃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자폐 증상이 심한 아이들을 살펴봐야 하는 박씨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직업을 갖기가 어려웠다. 아이들이 무슨 일이 저지를지 모르기에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직장이 필요했다. 부부는 잠시 외출해야 할 때는 어린아이들을 언니나 오빠에게 맡기고 집에 달아둔 폐회로티브이(CCTV) 2대를 통해 실시간으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민원이 계속되면 집주인이 계약을 갱신해주지 않았기에 항상 이웃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야만 했다.
어렵사리 입주한 임대주택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게 부부의 바람이지만, 지난 열여덟 차례의 이사처럼 이웃과 갈등으로 또다시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일용직 배달일을 하며 한달에 200만원 채 안 되는 박씨의 수입으로는 마땅히 갈 곳을 찾기 어렵게 됐다는 점이다. “(가게에서) 다른 사람을 찾았다고 하는 순간 갈 곳이 없어져요. 애들 때문에 정규직으로 갈 수 없는 상태니 답답하긴 하죠. 만약 (일하는 곳에서) 갑자기 나오지 말라고 하면 배달 대행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생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박씨의 고개는 바닥을 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8월 사고가 터졌다. 일곱째 준수가 3층 계단에서 구른 것이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준수는 뇌수술과 팔 골절 수술 등을 받아야만 했다. 요양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는 동생을 간호하려고 지희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준수를 치료하던 중 한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지난해 12월 엘에이치(LH)의 다자녀매입임대주택에 선정됐지만 박씨 가족은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입주하려면 보증금이 필요한데, 이전 지하방을 떠날 때 집주인에게서 돌려받은 월세보증금 500여만원은 고스란히 준수 병원비로 들어갔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복지재단에서 보증금을 마련해줬기에 입주할 수 있었다. 재수술까지 앞둔 상황에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박씨는 대한적십자사에 자신의 사연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보증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대한적십자사는 또 박씨 가족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가서도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모금 캠페인도 진행할 방침이다.
오는 4월 새로 이사 갈 집은 전과 같은 필로티 구조의 빌라지만 2층이기에 아래층이 없다. 박씨 부부가 이웃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한층 수월하게 아이들과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층간소음에 대한 부담도 덜었다.
박씨는 다시 한번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순간이 오길 기대하고 있다. “보증금이 없어 새로운 집으로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사를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오랜 기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지 못했는데, 준수 치료가 끝나면 새로운 곳에서 즐겁게 밥 먹고 싶어요.” 박씨 가족은 계속 희망을 꿈꿀 수 있을까.
캠페인에 참여하시려면
박씨 가족에게 도움을 주시려는 분은 계좌로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기업은행 148-013356-01-136, 예금주: 대한적십자사) 또 다른 방식의 지원을 원하시는 분은
대한적십자사(1577-8179)로 문의해주십시오. 모금에 참여한 뒤 대한적십자사로 연락해주시면 기부금 영수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금 목표액은 1000만원입니다. 후원금은 병원비와 생활비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대한적십자사는 박씨 가족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살피며 후원금을 투명하고 성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1000만원 이상 모금될 경우, 박씨 가족의 뜻에 따라 목표액이 넘는 금액은 다른 위기가정 지원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보도 이후
<한겨레>와 굿네이버스가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세아네 가족(가명)의 사연(<한겨레> 2020년 11월25일치 17면)이 소개된 뒤 2000만원(3월8일 기준)의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302분의 후원자가 “세아 파이팅! 지치지 말길”이라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굿네이버스는 “세아를 위해 따뜻한 마음과 사랑을 전해주신 후원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밝혔습니다. 후원금은 세아의 의료비와 통원치료비, 긴급생계비, 주거환경 개선비로 전달됩니다. 또한, 목표액이 넘는 금액은 세아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른 위기가정에 지원될 예정입니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