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리버벤드 뮤직센터 공연에서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 롭 핼퍼드(가운데)가 열창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캡이네.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앨범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1991년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 학교는 너무 갑갑했다. ‘공부머리는 있는데 집중력이 부족하고 끈기가 없다’는 평가를 중학교 선생들에게 듣던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도 공부머리는 있는데 집중력이 부족하고 끈기가 없었다. 사실 집중력과 끈기가 없는데 공부머리가 있었을 리 없다. 그건 그저 학생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살려서 생활기록부에 써야 했던 선생들의 고충에서 나온 별 의미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공부가 참 재미가 없었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말했다. “니는 맨날 음악 듣잖아. 악기 할 줄 아는 거 있나? 나 학교 밴드 들어갈 건데.”
나는 음악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주로 디바들의 노래를 들었다. 마돈나와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케리가 좋았다. 그 시절 부산 남자애들은 그걸 ‘가시나 음악’이라고 불렀다. 친구가 자기 카세트 플레이어를 건넸다. 이어폰을 귀에 꽂자 쿵쾅거리는 금속성의 사운드가 귓바퀴를 감돌며 외이도를 통해 고막을 때려 달팽이관을 흔들었다. 친구가 말했다. “가시나 같은 노래만 듣지 말고 이런 거 들어라. 메탈리카다.” 순간 피식 웃었다. 메탈리카?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는 알고 있었다. 번개 맞은 푸들 같은 머리를 하고 가랑이가 숨을 쉴 수도 없게 타이트한 가죽 바지를 입고 기타를 징글거리며 3옥타브의 고성을 지르는 장르였다. 나에게는 그거야말로 ‘가시나 같은 음악’이었다. 그걸 듣느니 차라리 머라이어 케리의 돌고래 비명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밴드 이름이 메탈리카라니. 그건 헤비메탈의 ‘메탈’과 아메리카의 ‘리카’를 아무런 고민 없이 이어 붙인 이름이 아닌가. 그런 게 좋을 리가 없었다.
어럽쇼. 근데 그런 게 좋아졌다. 전기 기타를 파괴하듯이 긁어대는 게 공사장 소음 같기만 하더니 어느 순간 천사의 하프 소리처럼 영롱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지구의 종말을 맞이한 다미선교회 신자들이 교회 바닥을 두드리듯이 때리는 드럼 소리는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베이스 소리는 좌심실 우심실의 흐름을 바꿨다. 무엇보다도 보컬인 제임스 헷필드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건 조금 전 시대의 우상이었던 존 본 조비의 달콤한 목소리와는 달랐다. 생목을 긁는 목소리였다. 탁했다. 강력했다. 포효했다. 사자였다. 상처 입은 늙은 사자가 생의 마지막에 얼룩말 한마리를 잡고는 내뱉는 소리였다. 전기 기타의 ‘디스토션’(일그러진 듯한 금속성의 소리)을 목으로 삼켜버렸다. 입시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때였다. 학교는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었다. 그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웠다. 그 답답함을 찢어발겨주는 건 헤비메탈이었다.
1980년대에 등장한 헤비메탈 밴드들의 음악은 엄청난 아카이브였다. 뒤늦게 발견한 아이언 메이든은 근사했다. 데프 레퍼드는 아름다웠다. 메가데스는 무자비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새롭게 발견한 가장 멋진 밴드는 주다스 프리스트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의 사제’라는 이름도 멋졌지만 무엇보다도 굉장한 건 보컬이었다. 주다스 프리스트는 정말이지 보컬을 위한 밴드였다. 롭 핼퍼드라는 보컬은 온통 징이 박힌 가죽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는 무대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그르릉거렸다. ‘이거야말로 지상 최고의 목소리군.’ 나는 확신했다. 1960년대에 결성한 주다스 프리스트가 전성기를 맞이한 건 1974년에 핼퍼드를 영입하고 1980년도에 명반 <브리티시 스틸>을 내놓으면서부터였을 것이다. 음악 비평가들은 이 앨범을 “헤비메탈의 정의”라고 불렀다. 1982년도 앨범 <스크리밍 포 벤전스>와 1984년도 앨범 <디펜더스 오브 더 페이스>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던 건 1990년에 발표한 앨범 <페인킬러>였다. 그건 내 10대의 고통을 죽여줬다. 당시 싸이월드에서 유행하던 말처럼 그건 ‘나라가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었다.
메탈의 세계는 확실히 남성의 세계였다. 전성기의 헤비메탈은 여성 팬들이 꽤 많았지만 어쨌거나 그건 끓어오르는 테스토스테론의 세계에 속했다. 모든 록밴드들에게는 ‘그루피’라고 불리는 여성 팬들이 존재했다. 밴드 멤버들은 콘서트가 끝나면 호텔에 몰려든 여성 팬들을 골라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잠을 잤다. 지금은 사라진 그 문화는 확실히 ‘미소지니’(여성혐오)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비윤리적인 게 아니라 쿨한 무언가로 받아들여졌다. 남성 팬들은 그런 메탈의 세계에 열광했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 그들의 음악을 연주하면, 그렇게 될 것 같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헤비메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어떤 장벽이 됐다. 나는 누가 봐도 ‘남성적인 남성’이 아니었다.
90년대의 남자 고등학교란 (물론 지금도 조금은 그렇겠지만) 정글이었다. 남성성이 약한 아이들은 정글 변두리의 존재였다. 학교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당시의 계급은 테스토스테론 수치에 따라 매겨졌다. 나는 가장 도태될 수밖에 없는 계급이었다. 그토록 빨리 헤비메탈이라는 음악에 빠져든 건 일종의 가면일지도 몰랐다. ‘헤비메탈을 듣는 남자라면 여성적일 수가 없다. 헤비메탈을 듣는 남자라면 남자다울 것이다. 헤비메탈을 듣는 남자라면 다른 남자들의 계급으로 올라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주다스 프리스트를 들으며 일종의 죄책감을 가졌던 것도 같다. 끓어오르는 마초 세계의 음악으로부터 위안을 받으며 남자들의 상위계급에 속하려 애쓴다는 것이 어쩐지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던 탓이다.
2008년 9월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 롭 핼퍼드가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한 첫 내한공연에서 멋진 무대를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1998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 핼퍼드가 <엠티브이>(MTV)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벽장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멋진 순간입니다. 이제 저도 걸어 나왔습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했습니다.” 나는 그 소식을 피시(PC)통신에서 처음 들었다. 온몸이 떨렸다. 우리는 이미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게이였고 그가 에이즈로 죽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머큐리는 단 한번도 커밍아웃을 한 적이 없었지만 핼퍼드는 했다. 지독할 정도의 마초 세계를 지배하던 늙은 사자가 정글을 향해 자신은 수사자를 좋아한다고 포효했다. 피시통신의 많은 메탈 팬들 중에서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핼퍼드 형님이 호모라고? 그럴 리가 없어.’ 아니, 그럴 리가 있었다. 핼퍼드는 게이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헤비메탈 밴드의 보컬이었다.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었다. 게이 헤비메탈 밴드 리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핼퍼드의 커밍아웃은 헤비메탈 역사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그래서 유명인들이 커밍아웃하는 것은 숨어 있는 성소수자들에게 막강한 힘이 된다. 특히 핼퍼드의 커밍아웃은 가장 남성적이라고 불리는 음악 장르에서도 다양한 성적 지향과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시화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성별 정체성에 부여된 스테레오타입도 때려부쉈다.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핼퍼드는 최근 인터뷰에서 주다스 프리스트의 전기영화를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나 또한 프레디가 평생 그랬듯 동성애자임을 숨겨야 했다.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삶을 살았고,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분명히 영화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언젠가 만들어질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 제대로 방영되지 못할 것이다.
2021년 2월 <에스비에스>(SBS)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방영했다. 아니, 그건 <보헤미안 랩소디>가 아니었다. 그들은 머큐리와 남자의 키스 장면을 삭제했다. 조연 배우들의 동성 키스는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머큐리와 여성의 키스 장면은 그대로 남겼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머큐리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묘사를 덜어내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는 영화다. 소셜미디어는 성소수자들의 분노로 폭발했다. 에스비에스 관계자들은 “동성애에 반대할 의도는 없었다”며 “동성 간 키스 장면을 불편해하는 의식이 사회에 깔려 있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했다. 15세 관람가라서 어쩔 수 없다고도 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극장 개봉 시 동성 키스 장면을 그대로 두고도 12세 관람가였다. 에스비에스로서는 차라리 방영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시청률에 목이 말랐다. 성소수자를 지우고 이 영화를 방영하기로 너무나 손쉽게 결정했다.
2021년 한국에서 여전히 ‘커밍아웃’과 ‘가시화’는 부정된다. 변희수 하사는 죽었다. 육군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한 뒤 강제 전역 당한 변 하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속부대 군단장과 여단장은 그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육군은 그를 내쳤다. 변 하사가 사망하자 육군은 “민간인 사망 소식에 따로 군의 입장을 낼 것은 없다”고 했다. 며칠 뒤 “안타까운 사망에 애도를 표한다”고 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진심도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나서지 않고 조용히 해결했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전역한 뒤 여군으로 다시 입대하면 되잖아?”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트랜스젠더가 죽은 건 여성이 죽은 게 아니니까 관심 없어.” 나는 이 모든 반응을 보며 절망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군인을 꿈꿨다. 전차를 운용하는 기갑부대 소속이었다. 국방에 필요한 너무나도 군인다운 군인이었다. 변 하사는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저는 성별 정체성을 떠나 제가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힘차게 기갑의 돌파력으로 차별을 돌파하겠습니다.” 그는 결국 돌파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이렇게 성소수자들을 지운다. 영화에서 지우고 티브이에서 지운다. 음악에서 지운다. 학교에서 지운다. 군대에서 지운다. 사회에서 지운다. 나는 지금 주다스 프리스트의 명곡 중 하나인 ‘비포 더 돈’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지금 옆에 스마트폰이 있다면 이 노래를 틀고 이 글 읽기를 마무리해주시면 좋겠다.) 헤비메탈에 익숙하지 않은 당신도 전주만 들으면 “아하!” 하고 외칠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동이 트기 전 당신의 속삭임을 들어요. 잠결에, 아침이 그를 데려가게 하지 마세요. 밖에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네요. 빨리 가라고 재촉하듯이. 한평생이었어요. 누군가를 찾은 이후로. 내 곁에 있을 누군가를 찾은 이후로.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는데 당신은 이제 떠나가네요. 제발 모든 걸 가져가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핼퍼드를 생각한다. 머큐리를 생각한다. 변희수를 생각한다. 가장 강력하게 남성적인 소세계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존재를 알리려 노력하는 성소수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속삭임을 생각한다. 아직 동은 트지 않았다. 성소수자들의 삶은 여전히 새벽빛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동이 트기도 전에 많은 성소수자들이 떠나간다. 아침이 데려가기 전에 그들의 속삭임을 들어야 한다. 속삭임은 모이면 외침이 된다. 이미 외침은 어디에나 있다.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 패션 잡지 <긱 매거진>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17년간 써온 글 중 아끼는 것을 모아 2019년 첫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물다. 품격과 허영, 쓸모 있음과 없음, 옳음과 현실 사이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3주마다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