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10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마니페스타 11’ 비엔날레에 참여한 미셸 우엘베크의 모습. EPA 연합뉴스
미셸 우엘베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말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남자다. 프랑스 백인 남자다. 1958년생이니 나이도 많다. 꼰대다. 정치적으로는 보수다. 보수 정도가 아니다. 종종 우파 극단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불릴 때도 있다. 무엇보다도 꽤 많은 독자들이 그를 성차별주의자나 여성혐오론자로 간주한다. 그의 가장 센세이셔널한 작품은 프랑스가 이슬람 국가로 바뀐 가까운 미래를 다룬다. 극우정당 국민전선을 경계한 프랑스의 좌우 진영이 결선에 진출한 이슬람당을 지지하고 결국 이 당은 정권을 거머쥔다. 처음에는 프랑스 사회에 맞춘 온건한 정책을 펼치던 이슬람당은 결국 프랑스의 오랜 정교분리 세속주의를 파괴한다. 프랑스가 늙은 대학교수들이 젊은 여성들을 후처로 거느리고 살아가는 이슬람 국가로 변모하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종교적 패러디라고 할 법한 이 책의 제목은 <복종>(문학동네)이다.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프랑스는 난리가 났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이 프랑스 사회에 만연한 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토대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책이라고 비난했다. 극우 국민전선의 당수인 마린 르펜이 “허구지만 언젠가 현실이 될 수 있는 소설”이라고 말한 것은 정말이지 미셸 우엘베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 큰 일이 생겼다. <복종>이 프랑스 전역에 출간되던 2015년 1월7일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리스트 두명이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화를 실었던 신문 <샤를리 에브도> 본사를 공격해 12명을 학살했다. 하필 그날 <샤를리 에브도> 1면에는 우엘베크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만평이 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두 사실을 연결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우엘베크는 신간 홍보를 포기하고 프랑스를 떠났다. 프랑스 총리 마뉘엘 발스는 “프랑스는 미셸 우엘베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복종>은 결국 프랑스 우파의 이슬람 혐오를 상징하는 책이 돼버렸다.
아마도 당신은 미셸 우엘베크라는 이름을 지금 처음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극도로 존경받고 극단적으로 미움받는 남자의 경력을 훑어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미셸 토마’라는 이름으로 1958년 동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섬 ‘라 레위니옹’에서 태어난 그는 착실히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는 프랑스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에서 농업경제학과 정보학을 공부했다. 그러고는 정보통신(IT) 업계와 국회 일을 거친 뒤 1985년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인으로서 꽤 명성을 얻은 그가 본격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건 1994년 첫 장편 <투쟁 영역의 확장>(열린책들)을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주인공은 서른살의 아이티 업계 종사자로 예민한 성격이나 삶에 대한 의지는 별로 없는데다 우울증까지 앓고 있다. 이 책은 그 뒤 우엘베크가 내놓는 소설들의 주제를 이르게 품고 있다. 경제적·성적 자유주의 사회에서 고통받으며 체제에서 탈락하는 남자들의 내면을 날카롭게 그려내는 것이다.
<투쟁 영역의 확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우엘베크는 1998년 스스로도 결코 능가하지 못할 걸작을 내놓았다. <소립자>(열린책들)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멸종’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 브루노와 미셸이다. 브루노는 이성이 부족하고 미셸은 감정이 부족하다. 브루노는 끊임없이 여자를 찾는다. 미셸은 끊임없이 인간을 혐오한다. 우엘베크는 그들이 왜 그렇게 극단적인 존재가 됐는가를 부모 세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소립자>가 출간되자마자 서구 문단은 뒤집어졌다. 누구는 서구의 종언을 부르짖는 현대문학의 절정이라고 했다. 누구는 혐오스러운 개똥철학이라고 했다. 이 책의 결론은 (가벼운 스포일러 주의! 만약 결말을 알고 싶지 않다면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시길!) 유전자조작으로 육체적 관계 없이도 번식하고, 모두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의 결말이 주는 세계관이 결국 순수 혈통의 교배를 통해 새로운 인류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주장했던 히틀러의 사상과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2019년 1월 프랑스 파리의 한 서점에 미셸 우엘베크의 소설 <세로토닌>이 진열돼 있는 모습. AP 연합뉴스
우엘베크 특유의 노골적인 묘사들도 이런 비판을 방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인종차별과 여성 비하적인 묘사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우엘베크의 인물들은 정말이지 쓰레기다. 그의 ‘남성’들은 지질하고 경멸스럽고 구차하고 너저분하고 민망하고 추접스럽다. 나는 한국어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이 문장에 다 집어넣을 수도 있다. 그의 최신작인 <세로토닌>(문학동네)을 한번 살펴보자. 주인공은 끝이 없는 권태에 사로잡혀 자발적인 실종자가 되기로 결심한 40대 프랑스 남성이다. 농업 전문가로서 정부에서 꽤 높은 보수를 받으며 살던 그는 삶을 정리하고 숨어든다. 그리고 ‘행복을 관장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을 강제로 끌어올리는 항우울제를 복용한다. 현대사회의 피로를 묘사한 책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당신은 이 주인공에게 자신을 대입하기를 꺼리게 될 것이다. 그는 여성을 끊임없이 성적 대상화하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말을 마구 내뱉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에서 가장 구역질 나는 캐릭터는 잠깐 등장하는 소아성애자 독일인이다. 주인공은 그가 머무르는 방갈로 근처에 사는 독일인 여행자를 몰래 지켜본다. 독일인에게는 어린 10대 소녀가 항상 방문한다. 우엘베크는 독일인의 방갈로에 몰래 숨어든 주인공이 컴퓨터에 담겨 있는 소아성애의 현장을 보게 되는 장면을 지나칠 정도로 세밀하고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치를 떨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과연 지금 한국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소아성애자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그 대목만 사진으로 캡처돼 소셜미디어에 수천번 공유될 것이다. 작가는 “거울로 세상을 비췄을 따름인데 거울 속의 세상이 추한 것을 작가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그 캡처된 대목만으로 소설과 작가를 재단할 것이다. 작가는 결국 사과문을 남긴 채 잠적할 것이다. 출판사는 책을 절판시키거나 해당 대목을 완전히 삭제한 채 재출간할 것이다. 다시 그가 소설을 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거울로 세상을 비췄을 따름인데” 운운은 우엘베크가 실제로 한 말이다.
당신은 어쩌면 이 글을 읽고도 <세로토닌>을 읽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뒤 ‘정치적으로 지극히 올바르지 못한 남성 주인공이 여성을 지속적으로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혐오하며 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소아성애자를 관찰하며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스토킹을 하며 끝나는 소설’이라고 간단하게 축약하며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엘베크 소설에 대한 이와 비슷한 반응들을 얼마든지 인터넷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런 비난은 온당한가? 이 글의 처음에 소개한 <복종>은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난다. 주인공 대학교수는 이슬람 학교가 된 소르본 대학에서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이슬람에 그냥 복종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항간의 불평에도 <복종>은 특정 종교를 혐오하기 위해 쓴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우엘베크는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가상의 프랑스 사회를 통해 지금 이슬람교와 서구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을 정신적 폐허를 동시에 풍자한다.
우엘베크의 책은 언제나 불쾌하고 불편한 인물과 표현으로 가득하다. 불쾌하고 불편한 표현을 지운다고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픽션에서 금기들을 금기한다고 금기하는 금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픽션은 세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는 거울 속 추접한 모습을 보며 우리 내부의 불편하고 불쾌한 욕망과 마주한다. 픽션은 종종 우리를 가장 근원적인 욕망의 바닥까지 끌고 내려가 냉정하게 내동댕이친다. 우엘베크의 소설들은 자비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절멸시키려 발버둥 치는 캐릭터들을 거침없이 그려낸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의 위선과 허위를 목도한다. 우엘베크는 그걸 마주하는 독자들마저 비웃는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우엘베크의 소설들은 로맨틱하다. 그 위선과 허위와 혐오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야말로 가장 간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그리고 실패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기가 막힐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주제의식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다. 가장 더러운 연못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재주다.
우엘베크 같은 작가가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우엘베크와 함께 살아 있는 위대한 서구 작가 중 한명일 가즈오 이시구로는 얼마 전 ‘두려움의 분위기’가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정말로 쓰고 싶은 글들을 쓰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2017년 노벨상을 받은 이 일본계 영국인 작가는 <비비시>(BBC)와 한 인터뷰에서 “익명의 무리들이 온라인에서 폭력을 행사해 작가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며 “특히 젊은 작가들이 이런 일을 겪을 것이 심히 우려된다”고 했다. 문제는 자기검열이다. 사람들은 작가들이 그려내는 캐릭터의 생각과 말을 작가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은 소셜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묘사와 표현 자체를 지워버리고 불편한 캐릭터들을 삭제하기를 원한다. 창작자들은 위험을 감수하느니 자신의 작품을 미리 검열한다. 가즈오의 말은 이런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젊은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캐릭터들을 묘사하는 데 자기검열을 할까 우려된다”며 “아직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이 불안정하다고 느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 할까 두렵다”고 근심한다.
최근에 만난 한 창작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연대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젊은 창작자들로부터 자주 들어요. 그런데 ‘연대’라는 것이 픽션 속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어야 하나요?” 나는 우엘베크의 캐릭터와 연대할 수 없다. 연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연대할 수 있는 캐릭터만큼이나 정치적으로 불공정하고 연대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혐오스러운, 불편한 캐릭터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심연을 두려움 없이 드러내는 캐릭터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윤리적인 캐릭터가 윤리적인 문학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윤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느냐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우엘베크는 더없이 윤리적인 작가다.(농담이 아니다!) 당신이 아직도 우엘베크를 읽기 망설이고 있다면 <세로토닌>의 대사를 하나 인용하고 싶다. “직업인의 삶은 ‘아무런 쾌락도 선사하지 않는 창녀’처럼 생각됐다. 윗세대부터 우리 세대까지 파괴된 것을 재건하는 데 철저히 무능했으므로 인류 문명에 대한 희망도 없다.” 당신이 이 문장을 참아낼 수 있다면 미셸 우엘베크의 세계로 뛰어들 준비가 된 것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한 온라인서점의 독자평을 들려드리고 싶다. “더럽다. 허나 타인을 조금 이해할 것만 같다.” 나는 이보다 더 우엘베크를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묘사한 문장을 본 적이 없다.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 패션 잡지 <긱 매거진>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17년간 써온 글 중 아끼는 것을 모아 2019년 첫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물다. 품격과 허영, 쓸모 있음과 없음, 옳음과 현실 사이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3주마다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