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오른쪽)와 신의진 연세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아동학대 사건에서 “아이들부터 살리자”며 ‘학대예방법’과 ‘학대치료전담센터’ 마련을 위해 뜻을 모았다. 정치하는엄마들 제공
“지금까지 아동학대 사건에서 왜 정작 아동을 보지 못했을까요?”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 장하나 활동가가 지난 6일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되물었다. 지난해 6월 천안 아동학대 사망 사건부터 같은 해 9월 인천 사건, 지난해 5월 벌어졌다가 올해 초 재조명된 양천 사건, 지난 2월 구미 사건까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었나. 성난 얼굴로 돌아본 학대의 현장에서 정작 아동은 뒷전 아니었나. 여행가방, 라면, 양부모, 아이 바꿔치기 등 ‘아이’가 사라지고 빈자리에 남은 연관 검색어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밖에
살아남은 아이들, 동생이 갇힌 여행가방에 올라가야 했던 형제들, 라면형제로 알려진 숨진 아이의 형, 그리고 정인이의 언니, 신원도 드러나지 않은 미스터리 속 구미의 또 다른 아이는…. 하루 평균 82명, 학대받는 아이들의 수다.(2019년 발생한 아동학대 3만45건 기준) 장 활동가는 신의진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아이들부터 살리자”며 뜻을 모았다. 나란히 전직 국회의원이기도 한 둘은 제대로 된 ‘학대예방법’과 ‘학대치료전담센터’를 마련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선생님 무서워. 장난감 뺏고 손 들게 했어.”
지난해 1월, 세돌이 다가올 무렵이었다. 민규(가명)는 말이 늦게 트였다. 더듬더듬, 무심한 듯한 말투로 민규는 “선생님”, “무서워”라는 단어를 와락 쏟아냈다. 집 앞 어린이집에 다닌 지 열달째 되던 때였다. 민규는 두살배기 시절부터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문을 나서면, 집 현관문 앞에 드러누워 떼를 썼다.
민규를 맡은 교사는 “적응기라 그렇다”고 말했다. 아이를 보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힘겹게 들어간 공립시설인데다, 정부기관 평가에서도 최고 등급을 받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를 맡기고 부모는 직장에 가야 했다.
고민 끝에 어린이집에 폐회로텔레비전(CCTV) 열람을 요청했다. 원장은 “아무 일 없으니 염려 말라”고 했다. 거기서 멈추려 했다. 그런데 아이의 불안이 그치질 않았다. “유난스럽다”는 뒷말을 감수하고, 엄마는 시시티브이를 직접 봐야겠다고 나섰다. 민규를 맡은 교사가 무릎을 꿇고 사죄하겠다는 뜻을 전한 건 그 때였다.
시시티브이 속 민규는 ‘장난감을 뺏기고, 손을 드는’ 수준으로 시달린 게 아니었다. 교사의 가랑이 사이에서 몸을 제압당하고, 교실 구석에 선 채로 교사가 던진 공을 맞기도 했다.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민규의 몸은 떨고 있었다.
결국 경찰 조사가 시작됐고, 한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어린이집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운영됐다. 구청은 경찰 조사를 핑계로 전수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걱정이었지만,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아동보호전문기관마저 아이의 상담과 치료를 미뤘다.
그렇게 넉달이 또 지나갔다. 민규 엄마는 아동학대가 맞는지를 두고 경찰이 “부모와 어린이집 사이에 시각차가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수사가 소극적이라고 여겼는데, 까닭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정치하는엄마들’이란 시민단체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지역 내 아동학대 피해자가 민규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2019년 11월 이후 1년여간 같은 지역 곳곳에서 발생한 여러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이 있었다. 경험은 서로 비슷했다. 피해 가족들은 때론 둘이, 때론 홀로, 맨땅에 이마를 찧듯 도움 줄 곳을 찾았다. 보건복지부, 구청, 시청, 국가인권위원회, 어린이집 이용불편신고센터, 아동보호전문기관, 경찰서, 고용노동부 그리고 청와대 게시판까지 찾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들은 ‘정치하는엄마들’에 모였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지역 언론에 어린이집 학대 사실 일부가 공개되면서다. 동네가 떠들썩해졌다. 어린이집은 그제야 전체 학부모에게 사실을 알렸다. 민규와 같은 반 아이 2명이 학대를 받았던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그리고 또 반년이 지났다. 민규는 아직도 집 근처인 어린이집 앞을 지날 때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때론 기겁을 하면서 까무러친다.
“그 집 아이 괜찮아? 우리 아이는 아직도 안 좋아.” 지난 1월, 정치하는엄마들에 모인 피해 아동의 엄마들은 아이들 걱정으로 가득했다. 피해 아이 가운데 한명을 빼고 모두 심리치료를 받고 있거나, 받은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치료로 제대로 된 효과를 보았다는 사례가 없었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이들의 대화를 들어주는 것 말곤 달리 방법을 찾지 못했다. 수사와 재판을 위한 법률 지원과 진상규명 지원만으로 부족했다. 더욱이 아동학대 심리치료 지원은 단체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아동학대 예방의 날’이던 지난해 11월19일, 한 지역의 어린이집 아동학대 피해자들이 ‘아동학대근절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이때만 해도 부모들은 피해 아동의 정신적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진단조차 받지 못했다. 정치하는엄마들 제공
장 활동가가 처음 신의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신 교수는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청소년정신건강의학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장 활동가처럼 19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현업에 복귀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의정 활동을 한 비례대표 의원이었다는 것을 빼면 딱히 인연은 없었다. 게다가 신 교수는 새누리당, 장 활동가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이었다. 상임위 활동도 신 교수는 주로 보건복지 분야, 장 활동가는 환경노동 분야로 길을 달리했다. 그래도 무작정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의 고통을 더 지켜볼 수만은 없었으니까.
신 교수도 장 활동가가 처음 전화해온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상태를 듣는 순간 이건 심각하다고 느꼈다”는 그는 “일단 아이들을 병원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장 활동가가 설득해 다섯 가족의 여섯 아이가 서울로 향했다. 신 교수의 ‘직감대로’ 아이들의 상태는 꽤 심각했다.
“아이부터 살리자.”
두 사람의 공조는 급물살을 탔다. 장 활동가가 속한 정치하는엄마들과 신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가 움직였고 두 단체가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머리를 맞대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난 6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의대 신의진 교수 연구실과 12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사무실에서 장 활동가와 신 교수가 두차례 만나 “비판의 차원을 넘어 대안을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신의진 교수(이하 신) : 아이들이 큰일 날 뻔했어요. 이번에 새삼 느꼈지만 정치하는엄마들이 이래서 귀하다니까.
장하나 활동가(이하 장) : 저희 단체는 부모들이 도움 요청할 데를 찾다 찾다 마지막에 오는 곳이잖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신 교수님이 맡아주셔서 다행이었죠.
신 : 처음 연락을 받고 ‘어? 이건 응급상황인데’ 싶더라고요. 자기 아이가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 부모들은 당장 격앙되어 교육시설 쪽이랑 싸우게 되거든요. 그때 아이는 방치되기 쉽죠. 만나보니 역시 그렇더라고요. 아이들을 최대한 응급환자로 다루면서 검사, 진단을 이어갔죠. 기억나요? 진단한 다음 내가 장 의원님(장 활동가는 ‘활동가’로 불러달라 했지만, 신 교수는 ‘장 의원님’이라고 했다)한테 전화를 걸었죠. “누가 멀쩡한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놨어!” 너무 열이 받더라고.
신 교수는 또 다른 학대 피해 어린이 윤아(가명)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만 36개월 조금 넘은 윤아가 진료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신 교수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신 교수는 “진단을 위한 (심리)검사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신 : (고개를 숙이고 두 팔을 다리 사이로 가져가면서) 아이가 계속 이런 태도로 있더라고요. 제 경험으로도 그 정도의 심각한 아이는 처음이었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랑 있으면 금방 풀려서 ‘좋아라’ 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10분 동안 초콜릿을 주거나 여러가지 시도를 다 해봐도 검사를 못 하겠는 거예요. 고개를 숙이고 ‘끙…’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뭐랄까.
장 : 할미꽃….
신 : 저와 대화하면 열이면 열, 10분쯤 지나면 웃어요. 그러면 애들을 검사하고, 심리치료에 들어가죠. 그런데 윤아는 전혀 반응을 하지 않더라고요. ‘유아기 우울증’이었죠. “어머니 죄송한데, 윤아는 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이 너무 나와서 불안을 줄이는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죠. 36개월 아이가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엄마도 주변에서도 윤아가 그 정도일 줄은 모르는 상태로 지냈던 거죠.
신 교수의 진단을 받아든 윤아 엄마는 처음에는 네살배기 아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학대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를 만난 게 2019년 9월이다. 사건이 불거진 게 이듬해 1월이니 학대 환경에 놓였던 기간은 4개월 정도였다. 실제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한겨레>가 입수한 가해자(교사)의 공소장에는 ‘(교사가 윤아의) 바지를 잡아당기거나’, ‘벽에 6분간 앉히거나’, ‘오른팔을 잡고 강하게 흔들어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빼앗은 뒤 교사의 앞에 서 있게’ 했다고 기재돼 있다. 검찰은 일부 신체학대를 빼면, 가해사실 대부분을 정서학대로 분류했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도 윤아의 마음속 상처까지 심각하게 알아채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한 뒤로 말수가 적어지고, 성인 여성을 보면 주눅이 드는 듯한 윤아의 변화를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모습 정도로 여겼다. 게다가 이후 윤아는 오빠가 다니던 유치원을 별 탈 없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이후 ‘괜찮겠거니’ 하고 지내온 시간까지 따지면 1년이 넘는 기간이다. 엄마는 첫 진단이 나온 뒤에 윤아를 데리고 다른 병원에도 들러봤다. 우울증 진단이 바뀔 리 없었다. 엄마는 윤아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깨달았다. 아이들이 받은 고통의 크기가 다르고, 그로 인한 상처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윤아가 그랬듯,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윤아 엄마는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신 교수는 “당시 윤아 엄마가 정치하는엄마들을 통해 병원에 오지 않았다면, 아이는 아마 상처를 안고 평생을 우울감 속에 살아야 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예상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아동학대 사례는 더 있다. “선생님이 머리통을 때렸다”고 엄마한테 얘기한 민주(가명)는 아예 지적 발달을 멈췄다. 물리적 충격보다 더 큰 정신적 충격이 민주의 머릿속에 가해진 것이다.
신 : 원래 언어발달 지연이 보이던 아이예요. 그런데 학대 충격이 더해지면서 발달을 멈추고 (뇌가) 퇴행한 것으로 보여요. 한참 클 나이인데…. 그대로 두면 인지기능에 매우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어요.
(종이를 꺼내 몇 개의 점을 찍고 선으로 연결한 뒤 그 위로 엑스표를 치며) 세살 중반이면 점으로 떨어져 있던 각각의 신경세포가 선으로 이어져 신경망으로 연결돼야 하거든요. 쉽게 얘기하면 ‘경험’에 의한 연결망이 생겨야 하는데, 학대를 받으면 스트레스로 인해 그 선이 다 뚝뚝 끊어져버려요. 민주가 지금 이런 상황이고요. 이렇게 뉴럴네트워크(신경망) 형성이 부전(몸의 기능이나 발육 등이 불완전)하면, 발달 지연의 소지가 있는 아이는 뇌가 상해버릴 수 있는 거예요. 상상이 잘 안 되시죠? 사실 엄격한 양육만으로도 아이의 두뇌가 바뀐다는 연구가 나와 있어요. 한창 뇌가 클 나이에 아이가 (훈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만 받아도 전두엽과 편두엽 크기 자체에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학대야 말할 것도 없죠. 공포를 조절하는 것(편두엽), 스스로 억제하는 기능(전두엽)을 제대로 갖추지 못할 수 있어요. 이 정도면 피 나고 부러진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죠.
지난 1월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 쪽이 신의진 교수에게 소개한 6명의 아동학대 피해자들은 서울 성동구 엠비아이클리닉센터에서 심리검사와 신 교수의 진단을 받았다. 엠비아이클리닉 제공
피해 아동 만난 신의진 “응급상황”
36개월 아이 ‘유아기우울증’ 진단
“불안, 퇴행, 공격성향…후유증 심각”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나면 사회는 가장 먼저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에 온 힘을 쏟는다. 그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에 동의하면서 아동학대가 발생할 때 아이들 마음을 살피는 일에 소홀했던 수가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장 : 교통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몸부터 살피잖아요. 그래서 급히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가기도 하고요. 사람이 먼저니까요. 그런데 왜 학대가 발생하면 아이 먼저 살피는 일을 하지 못했을까요. 아이들이 신음하고 있는데, 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까요.
신 : 늘 첫 단추를 잘못 끼워왔음에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온 거죠.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아이들을 진단하고 또 치료하는 거예요. 그다음 학대의 원인을 찾아 들어갔어야죠. 사실 치료의 과정이 진상규명의 열쇠예요. 우리나라는 정서학대를 가볍게 생각해서 “죄가 안 된다”거나 “증거가 불충분하다” 정도로 넘어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미국의 경우는 아동학대 발생 초기부터 의료진의 진단과 수사를 병행합니다. 학대 사건 때 소아정신과 의사를 부르죠.
장 : 윤아 사례는 그래서 더 중요해 보여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가 평생 남을 수 있으니까요. 사건이 발생하면 아이부터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더 폭넓게 공유돼야 할 것 같습니다.
신 :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에서 전문가(의사)의 조력 없이 섣불리 조사를 하지 않아요. 전문가 없이 나섰다가 수사까지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죠. 조사는 의사가 아이를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수사기관이) 어떤 질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하죠. 물론 무조건 진행하는 것도 아니에요. 의사가 아동의 상태를 진단한 뒤 ‘아이가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치료 뒤 물어봐야 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 모두 동의를 해요. 진단과 치료, 수사가 함께 가면 수사 편의성뿐만 아니라 혐의를 밝히는 데도 수월해지죠. 아이가 비슷한 진술을 여러번 할 필요도 없고요.
전문가의 판단 없이 수사를 그르치고, 결국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발생한 ‘천안 아동학대 사망 사건’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초기 비전문가인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조사에 의지해 수사했다. 이 기관 관계자는 현장에서 피해 아동을 만났고, 보고서에 “(부모를) 경계하거나 말을 머뭇거리는 모습이 없고, 진술 과정에서 불안한 모습이 관찰되지 않았다”고 남겼다. 사안의 심각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진단, 치료, 수사가 함께 진행됐더라면 아이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장 : 미국과 달리 우린 외상이 아니면 피해 입증부터가 어려워요. 경찰이 시시티브이를 18배속으로 돌려 본 다음 ‘그 정도를 학대라고 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조차도 제대로 공개를 하지 않아 부모들이 얼마나 애를 먹는지. 결국 엄마들이 찾아서 다시 경찰서에 재조사를 요청하고, 경찰은 마지못해 다시 조사하고.
민규의 사례도 비슷했다. 1년 전부터 엄마들은 경찰이 부실 수사를 한다고 주장해왔고 실제로 엄마들이 시시티브이를 다시 검토해 혐의사실을 밝혀 고소를 했다. 결국 올 초 수사 주체가 관할 경찰서에서 시도경찰청으로 변경됐다.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정치하는엄마들의 법률지원도 한몫했다. 새로 구성된 수사팀이 시시티브이 재조사만으로 피해사실 76건을 추가로 밝혔고(기존 42건), 민규를 포함해 한 반에 3명이던 피해자는 모두 10명으로 늘어났다. 증거 확보도 엄마들의 주장을 따랐다. 애초 관할 경찰서는 영상 보관 기간이 60일인 시시티브이를 포렌식하면 더 많은 피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모들의 요구에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경찰청이 입장을 바꿔, 결국 포렌식으로 10개월치 영상이 추가됐다. 영상 분석을 마치면 앞으로 더 많은 혐의점이 발견될 것이라고 엄마들은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다시 아이들이다. 수사 과정 중에 아이들은 제대로 된 검사나 진단을 받지 못했다. 방치된 만큼 상처는 깊어지고, 치료 기간은 늘어난다.
신 : 상처가 우울이나 퇴행으로만 드러나는 건 아니에요. 동훈이(가명)처럼 학대의 상처가 아예 공격 성향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장 : 동훈이 가족은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무료 상담 과정에서 “가해 교사가 피해 아이 때문에 힘들었겠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어요.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진단과 조처가 어떤 수준인지 이것만 봐도….
신 : 동훈이 말고 다른 아이들도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3~4회 무료 상담을 받았다고 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았더라고요. 전문의료기관에서 최소 1년은 치료하면서 지켜봐야 해요. 아이 하나를 살리는 일이에요. 그게 쉽나요? 치료 한달 만에 겨우 웃기 시작한 윤아나 윤아 부모님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에요. 다음 단계는 어린이집에서 당한 피해를 아이한테서 끄집어내는 것이거든요. 어린이집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질문을 시작하면 아이들은 백이면 백, 모두 자지러져요. 멀쩡하게 잘 있던 아이가 상담사를 막 때리는 일도 있어요.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는 것이니까요. 모두 괴롭지만,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과정이에요.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아이 스스로 모듈레이션(재조정)하도록 전문가가 돕는 과정이거든요. 트라우마를 직접 마주하는 치료까지 모두 끝나야 겨우 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신 교수는 1990년대 중반 미국 유학 시절 영유아정신의학을 전공했다. 신 교수는 “무엇보다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이 중요하다”며 “애초에 우울증인 줄 몰랐던 윤아처럼 방치된 아이가 있을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어린이집 다른 아이도 모두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학대의 장면을 스치듯 보기만 해도 트라우마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장 : 지난해 천안에서 발생한 학대 사건의 경우에도 엄마 지시로 피해 아동이 들어간 가방 위에서 뛴 아이들 또한 또 다른 형태의 피해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걸 놓쳤네요. 챙겨야 할 아이들이 따져보니 너무 많아요. 2019년 어린이집 보육교사가 아동학대 가해자로 확인된 것만 1384건이에요. 여기에 관련된 아이들 가운데 제대로 진단받은 직접 피해 어린이가 아마 열 손가락에도 미치지 않았을 거예요.
신 : 그러니까 장 의원 말대로 1384건이 발생한 각각의 어린이집에 평균 10명이 있다고 해도 1만명 이상이 진단을 받았어야 해요. 그러다가 가족 전체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어요. 정부가 정서적 학대를 쉽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해요.
장 : 특히 가정 내 학대로 분리된 아동은 장·단기 보육시설에서 치료와 상담을 전혀 받지 않고 있어요. 출생률을 높이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지금 있는 아이들 가운데 학대로 마음을 다친 아이들부터 당장 치료해야 됩니다.
두 사람의 논의는 ‘아동학대예방법’에 모아졌다. 미국의 아동학대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법률(Child Abuse Prevention and Treatment Act)을 모델로 해 모든 아동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분명히 하고 아동학대 관련 교육, 치료 및 연구기금 지원 등을 하자는 것이다. 국내에도 아동학대와 관련해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아동복지법’ 등이 있긴 하다. 하지만 방향성이 다르다. 2018년 배미란 울산대 교수(법학과)는 ‘아동학대에 관한 검토와 법적 과제’라는 논문에서 “특례법은 주로 아동학대 행위자에 대한 제재나 처벌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아동학대의 예방이나 방지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아동학대 사후 조처에서 아이를 중심에 두고 있지 않다.
신 : 우선 당장 내가 키우는 또는 가르치는 아이가 이상행동을 할 때,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전문가와 상의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요. 당장 할 수 있어요. 우선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전문가와 어린이집 등 기관 종사자에게 손쉽게 질문과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일 체계를 만드는 거예요. 지역별 네트워크를 구축해 저인망식으로 피해 아동을 한명씩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피해 아동을 초기부터 제대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학대치료전담센터로 나아가야죠.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게 없어요. 지역 국립대학병원 레벨과 연계하면 오래 걸리지 않아요. 문제는 돈(예산)이죠. 이게 쉽지 않다는 건 알죠. 장 의원도 저도 국회에서 일해봤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근거가 되는 법부터 만들어야죠. 아동학대예방법, 장 의원님, 한번 해봅시다.
장 : 당장은 힘들지 몰라도, 곧 대선도 있으니 제안해볼 만한 일이죠.
신 : 선례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들을 살릴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는 겁니다. 정치하는엄마들이 아동학대의 고통을 안고 사는 가족들을 찾아서 연결하면, 전문가 집단인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가 필요한 조처에 나서는 방식 같은 것이죠. 적절한 치료가 없으면 폭력이 대물림될 수도 있어요. 치료, 수사, 예방이 한 몸인 이유예요.
지난 6일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왼쪽)와 신의진 연세대 교수가 만났다. 두 전직 의원은 2019~2020년 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 피해자들을 지난 1월부터 함께 보살피며 아동학대 예방 대책 마련에 뜻을 모았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장하나 “상처입은 아이부터 돌봐야”
치료-수사 하나로 묶는 제도화 필요
학대치료전담센터 등 정부 나설 때
신 교수는 2008년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주치의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후로도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등의 피해자를 위한 활동을 이어왔다. 장 활동가는 2017년 첫발을 뗀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에서 활동하며 2018년 비리 유치원 정보공개를 통해 유치원 3법을 이끌고, 같은 해 ‘스쿨미투’의 법률지원을 하는 등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신 교수는 “1996년부터 2년 동안 콜로라도대학에서 배워 온 게 바로 학대받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며 “미국에서 배워 온 ‘기술’을 이제야 제대로 쓸 기회”라고 했다. 장 활동가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는데 손을 잡아주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리고 지난 12일,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사무실에서 둘을 다시 만났다. 강미정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와 이희엽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부회장이 함께했다. 신 교수는 강 대표와 함께 ‘폭력·학대 근절 및 예방을 위한 활동과 치유 대상의 치료 및 성장 지원을 위해 상호 의견을 공유하고 적극 협력한다’는 업무협약서에 서명했다.
신 : 그러고 보니 보수, 진보 정당 출신 전직 국회의원끼리 모여서 일을 벌였네요. 우선 아동학대로 피해 입은 이들부터 정치하는엄마들로 모이도록 알려갑시다. 우리 국회 가서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장 의원?
장 : 이제라도 남겨진 아이 하나 없이 돌보자. 이제 시작입니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장철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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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의 정관이 개정됐다. ‘엄마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이란 대목 앞에 ‘아동’을 포함시켰다. 사단법인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누리집에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외국 속담이 적혀 있다. 교집합을 가진 두 단체는 지난 12일 아동학대를 근절하고 예방하는 활동을 함께하기 위해 협약을 맺었다.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 장하나 전 의원과 한국폭력학대예방협회 회장 신의진 전 의원이 중심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