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훈련소 30연대에서 사용한 관찰·면담 체크리스트. 독자 제공
육군훈련소 일부 부대에서 훈련병들에게 이성친구의 임신중지 경험 등을 묻는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게 하다 인권침해를 의식해 최근 해당 리스트의 사용을 중단한 것으로 드러났다.
11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육군훈련소 30연대는 지난 3월29일 입소한 훈련병들에게 “이성친구의 낙태 경험이 있냐”, “가족 중 전과자가 있냐” 등의 질문이 담긴 ‘관찰·면담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게 했다. 육군은 지난달 자체 인권조사에서 해당 리스트를 확인하고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사용을 금지했다.
관찰·면담 체크리스트는 “양친 생존여부-생존, 편부, 편모, 계모, 계부, 별거, 이혼, 고아”, “생계수단은 안정적이며 가정은 화목한가”, “가출 경험”, “입대 전 전과 사실”, “본드, 약물, 마약 복용, 문신 경험 여부” 등 가족사항과 훈련병의 기존 경험에 대한 질문 등 32문항으로 구성돼 있다. 여자친구에 대해서는 임신중지 경험과 더불어 “현재 이성친구와의 관계-교제 중, 약혼, 결혼, 동거”, “이성친구와의 문제 발생 시 사고 유발 가능성?-낮다, 보통, 높다” 등에 대해서도 파악했다. 일부 부대에서 입소 초 면담 과정에서 훈련병들에게 이 리스트를 작성하게 해 자대 배치 시 개인 신상기록부와 동봉해 발송했다. 해당 리스트는 지난해부터 가장 최근 기수 입소일인 올해 3월29일까지 최소 9차례 이상 사용된 것으로 전해졌다.
리스트를 작성한 병사들은 <한겨레>와의 전화·서면 인터뷰에서 “인권침해”라고 토로했다. 훈련병 ㄱ씨는 “훈련병들이 본인뿐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의 아픈 경험을 타의로 털어놔야 할지에 대해 큰 스트레스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이라며 “이를 감췄다가 적발됐을 때 받을 불이익이나 사실을 말했을 때의 시선 등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지적했다. “낙태나 가족 중 전과자 존재 여부가 군대와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다. 질문을 받고 불쾌했다”,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큰 상처일 수 있다”,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의 반응도 나왔다. 조교로 복무하는 ㄴ씨는 “훈련병들이 특정 질문에 대해 꼭 답을 써야 하냐고 물으면 소대장이나 조교들은 ‘그냥 써’, ‘해당 사항이 없으면 없다고 하면 되잖아’ 등의 대답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작성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며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육군은 지난달 16일 자체 인권조사에서 이 리스트를 확인해 사용 금지를 지시하고, 지난달 22일 사용 금지 공문을 해당 부대에 보냈다고 밝혔다. 육군 관계자는 “(해당 리스트가)인권침해 소지가 있어 식별 즉시 사용을 금지했다”며 “주기적인 실태 점검을 통해 인권이 보장되는 병영환경을 조성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군이 정상이라고 규정한 범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사고 위험성이 있다는 편견과, 개인의 내밀한 영역들을 지휘관이 다 알아야만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작용한 결과”라며 “장병들의 권리의식이 늘어나는 데 발맞춰 군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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