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성차별적인 용어로 꼽혀온 ‘성적 수치심’을 훈령이나 예규 등에서 ‘성적 불쾌감’ 등으로 바꿔야 한다는 내부 권고에도 대검찰청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성 평등 관점에서 검찰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검 양성평등정책담당관실은 지난해 여성가족부 지침을 근거로 대검찰청 소관 훈령 40개와 예규 230개 등 모두 270개를 대상으로 성별영향평가를 벌여, 훈령 9개와 예규 35개에 나오는 용어를 성 평등 관점에서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지난해 10월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 또는 ‘불쾌감을 주는 등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이란 말로 수정할 것을 권고한 게 대표적이다.
대검 예규인 범죄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지침을 보면, “검사는 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 범죄의 피해자를 조사하는 경우에는 제출된 증거자료 중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물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한다”라고 돼 있다. 대검 훈령인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에도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가 조사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 등을 느끼지 아니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양성평등정책담당관실이 ‘수치’나 ‘수치심’을 수정하라고 권고한 것은 이런 표현이 과거 정조 관념에 뿌리를 둔 개념으로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으로, 실제 피해자들은 ‘수치심’이 아닌 ‘분노’와 ‘공포’, ‘무기력함’ 등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실제 <한겨레>가 지난해 8월 20~40대 여성 11명을 인터뷰한 결과에서도, 이들 대부분은 ‘성적 수치심’이 아닌 ‘성적 불쾌감’이나 ‘성적 빡치심’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기사: 성적 수치심, 안 느꼈는데요? ‘성적 빡치심’을 느꼈어요)■ 수치(羞恥) : 「명사」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표준국어대사전)
■ 수치심(shame) : 다른 사람이 자신을 결점이 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판단할 때 발생하는 정서.(심리학용어사전, 한국심리학회)
이런 취지의 대법원 판례와 국회 개정안도 있다. 대법원은 지난 1월 이른바 ‘레깅스 불법촬영 사건’에서 피해자가 느낄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뿐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한 피해 감정을 포함한다”며 피해자의 다양한 피해 감정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넓힌 바 있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해 8월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에 명시된 ‘수치심’을 ‘불쾌감’으로 바꾸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전문가들 의견도 다르지 않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2018년 경찰, 교수, 검사, 판사, 변호사, 비정부기구(NGO) 등 47명을 대상으로 ‘처벌법상 사회적 법익 관련 용어 변경의 필요성’을 조사한 결과, 과반수의 전문가가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65.2%)이나 ‘성적 모욕감’(63%)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대검은 내부 권고가 있고 나서 8개월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관련 내용을 검토만 할 뿐 개정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검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개정을 권고한 것은 맞지만, 상위법령이 개정되지 않아 하위법령인 훈령과 예규를 개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채다은 변호사는 “성적 불쾌감을 단순 불쾌감까지 확대 해석하는 것은 형법상 처벌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겠지만, 대법원 판결에도 나왔듯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는 것은 피해자 보호와 성 평등 관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대검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손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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