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니 리펜슈탈은 최고의 재능을 지닌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그가 만든 나치 찬양 영화들을 보는 불편한 경험을 통해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하게 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히틀러의 치어리더. 이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에바 브라운을 떠올릴 것이다. 지구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와 최후를 함께했던 여성이다. 나에게 히틀러의 치어리더라는 단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재능이 있었던 한 다큐멘터리 감독을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레니 리펜슈탈이다. 이 이름이 낯설다면 유튜브로 들어가서 <올림피아>(Olympia)와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를 검색해보시라. 전자는 베를린올림픽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후자는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당신은 ‘내가 왜 나치 프로파간다’를 봐야 하는 거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게나 말이다. 레니 리펜슈탈은 일종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다. 영화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쉬 꺼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리펜슈탈의 영화를 보기 위해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놀라운 역사를 담은 창작물의 정치적 의도가 불순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리펜슈탈은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1923년 무용가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무용가로 활동하면서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인간의 육체였다. 잘 만들어진 인간의 몸이 가진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표현하는 것은 이후로도 예술가로서 리펜슈탈의 지속적인 관심사가 된다. 무릎 부상을 입고 무용가로서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리펜슈탈은 곧 다른 예술에 빠져든다. 그는 독일 감독 아르놀트 팡크의 <운명의 산>(The Holy Mountain)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당대 유행하던 ‘산악 영화’ 붐에 올라탄다. ‘산악 영화’는 대자연에 도전하며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야기들을 다룬 장르였다. 리펜슈탈은 이 장르의 영화들에 배우로 출연하자마자 당대 베를린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성 배우 중 한명이 됐다. 나머지 한명은 전설적인 마를레네 디트리히였다.
리펜슈탈의 꿈은 그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31년 리펜슈탈영화사를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첫 연출작인 <푸른 불>(Die Blaue Licht)을 제작했다. 여기서 영화 역사상, 혹은 인류 역사상 가장 필연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에서 인간 승리를 다루는 리펜슈탈의 작품에 감화를 받은 것은 오스트리아 화가 출신의 약간 정신이 나간 지도자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하기 위한 영화감독을 찾고 있었다. 리펜슈탈은 결국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히틀러는 당시 떠오르던 ‘영화’라는 매체를 프로파간다로서 이용할 꿈을 꾸고 있었다. 리펜슈탈은 단순히 배우로 머무르지 않고 카메라 뒤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는 연출가가 되고 싶었다. 거래는 윈윈이었다.
리펜슈탈이 처음으로 만든 히틀러 주문 영화는 1933년 작 단편인 <신념의 승리>(Der Sieg des Glaubens)다. 1933년 8월30일에 열린 제5차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이 단편은 히틀러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인류역사상 가장 찬양받고 미움받는 장편 다큐멘터리가 탄생한다. 1935년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의지의 승리>다. 이건 그야말로 괴물 같은 영화다. 바그너의 장중한 음악이 흐른다. 비행기가 뉘른베르크에 도착한다. 히틀러가 인간들의 영토에 처음으로 강림하는 신처럼 내리자 사람들은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환호한다. 전당대회가 시작되면 영화는 나치 돌격대, 나치 친위대 등 히틀러의 직속 부대들이 뉘른베르크로 모여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리펜슈탈은 히틀러 유겐트 젊은이들이 히틀러를 향해 보내는 순진무구해 보이는 선망을 카메라에 계속해서 담는다. 히틀러는 말한다. “여러분은 우리의 살이며 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른의 마음에서 불타는 정신과 똑같은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대한 행렬이 독일을 행진하고 있는 지금, 여러분도 그 행렬에 있습니다.”
이건 다큐멘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어쩌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다큐멘터리의 정의는 ‘기록 영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영상 매체다. 그러나 인간이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이상 다큐멘터리의 정의는 종종 흔들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어쩌면 함정이다. 사실을 카메라의 작은 프레임 속에 담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하는 순간 사실은 다시 인간의 손으로 쓰인 일종의 허구가 된다. <의지의 승리>는 그 아이러니한 대표 사례다. 리펜슈탈은 단순히 히틀러의 부탁으로 전당대회를 기록했을 뿐이라고 계속해서 변명했다. 그러나 리펜슈탈의 <의지의 승리>는 그저 기록물이 아니다. 그는 히틀러를 다가올 독일의 미래를 책임질 신성한 존재로 담아내기 위해 모든 영화적 기술을 모조리 활용했다. 리펜슈탈의 카메라는 좀처럼 히틀러를 정면에서 잡아내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히틀러를 끊임없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잡는다. 아래에는 언제나 수많은 나치 당원들의 젊고 숙연하고 열광적인 얼굴이 있다. 리펜슈탈은 그저 기록하지 않았다. 현대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많은 기법을 총동원해서 나치의 위대함을 ‘영화적’으로 다시 재조합한다.
자신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올림피아>에 등장했던 손기정 선수(왼쪽)가 1956년 독일을 방문했을 때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레니 리펜슈탈. 연합뉴스
불편한 경험 주는 영상 프로파간다
표현물 금지는 유아적 해법일 뿐
대중은 스스로 윤리 딜레마 경험
국내 김일성 회고록 출간 논란도
헛웃음 나올 프로파 선전물일 뿐
히틀러는 만족했다. 대만족했다. <의지의 승리>가 ‘영상 프로파간다’로서 나치즘에 대한 최고의 선전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히틀러는 리펜슈탈에게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기게 된다. 지금까지도 올림픽을 담은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기록되는 <올림피아>다. 리펜슈탈은 히틀러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당대 최고의 장비를 모조리 사용해 <올림피아>를 찍어냈다. 지금 다시 보아도 <올림피아>는 놀라운 경험이다. 리펜슈탈은 ‘육체’가 갖는 강인한 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내는 모든 영화적 기술을 총동원한다. 그리스 신전의 조각들을 아름답게 담아내던 카메라는 곧 올림픽의 몇몇 중요한 순간들로 옮겨간다. 남성과 여성의 육체는 카메라 앞에서 마치 아름다운 기계장치처럼 움직인다. 뛰는 선수들 옆에 카메라를 설치한다거나 하는 리펜슈탈의 기법은 지금 올림픽 중계 촬영의 어떤 기본적인 원칙을 고안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리펜슈탈은 전범으로 기소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최첨단 매체와 결합한 나치 프로파간다로 열렬하게 사용됐다. 리펜슈탈이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악마와의 악수였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방어했다.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지시에 따라 만든 것뿐이다. 오직 영화 미학만을 생각했다”고 끝까지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결국 리펜슈탈은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법적으로 무죄를 받았지만 세상은 용서하지 않았다. 히틀러와 나치즘에 기생하며 영예를 얻은 감독이라는 비난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1962년부터 아프리카 누바족의 삶을 10년 동안 기록한 사진집 <누바>(Die Nuba)를 1973년에 내놓는다. 2002년, 100살의 나이로 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뒤 제작한 영화 <물 아래의 인상>(Impressionen unter Wasser)은 마지막 작품이 됐다. 오욕의 이름으로도 계속해서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리펜슈탈은 이듬해 죽었다.
우리는 리펜슈탈의 영화를 계속 볼 수 있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그의 작품들은 금지되지 않았다. 당신은 디브이디(DVD)로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볼 수 있다. 유튜브나 다른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를 찾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수천만명을 학살했던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를 보는 건 매우 불편한 경험이다. 리펜슈탈의 천재성은 심지어 한 세기가 흐른 지금에 다시 보아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영상들을 만들어냈다. 그 천재성은 히틀러라는 인물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시를 통해 불타올랐다. “맥박이 뛰는 관자놀이나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을 통해서 고군분투하는 인간 육체를 그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호한 리펜슈탈이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르다.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 <올림피아>의 한 장면.
우리는 리펜슈탈의 영화를 보면서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딜레마를 통해 정치와 카메라와 예술가의 윤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표현물의 ‘금지’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딜레마를 경험할 길 자체를 막아 세운다. 금지는 가장 손쉽고도 유아적인 해결법일지도 모른다.
김일성 회고록이 얼마 전 출간됐다. 제목은 <세기와 더불어>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부터 해방 직후인 1945년까지의 항일 투쟁을 담은 이 책은 북한에서 출간된 버전처럼 8권이 1세트다. ‘장군님 축지법 쓰시네’ 같은 유사종교적인 기술들은 없다. 하지만 책이 발간되자 난리가 났다. 보수단체들은 대한민국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판매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한국의 많은 온라인 서점들은 책을 구매한 소비자가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판매를 중지하고 ‘절판’ 꼬리표를 달았다. 문제는 역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 7조는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한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하는 행위’를 처벌하게 되어 있다. 맞다. 그것은 낡은 유물이다. 더는 실질적인 효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살아 있다. 적어도 책 한권을 잠시 판매중단 시킬 정도로는 살아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쪽의 책 소개를 보고 잠깐 웃음을 터뜨렸다. “20여 년간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싸워온 투쟁기록을 고스란히 녹여 낸 진솔한 내용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다”는 소개는 이 책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라는 점을 확실히 한다. 특히 수채화처럼 그려냈다는 표현은 정말 재미있다. 대개 우리는 맑고 아름다운 감성과 광경을 ‘수채화’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 일종의 아이러니한 농담 같은 표현을 읽으며 “이거야말로 투명한 이적이 맞네”라며 낄낄거렸다. 당연히 한국 법원은 이를 금지하지 않았다. 법원은 회고록 판매와 배포를 금지해달라는 시민단체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출판 단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법원의 결정은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규정이 더 이상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장치로 사용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나는 <세기와 더불어>의 판매가 다시 재개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평소 수채화 같은 글을 잘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수채화처럼 그려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리펜슈탈이 궁금해졌다면 유튜브에서 <올림피아>의 마지막 장면을 찾아보시기를 권한다. 손기정은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리펜슈탈은 선수들의 복부에 부착한 카메라를 통해 그들의 발이 땅을 박차고 달리는 것을 보여준다. 리펜슈탈은 이 모든 것을 슬로모션으로 담는다. 근육으로 만들어진 다리와 발이 천천히 바닥과 붙었다 떨어진다. 화면을 보는 우리는 손기정이 된다. 그의 발이 된다. 그의 육체가 된다. 그의 고통이 된다. 그의 꿈이 된다. 그리고 손기정의 꿈은 히틀러의 치어리더에 의해 영원히 기록됐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딜레마다. 혹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딜레마다.
▶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 패션 잡지 <긱 매거진>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17년간 써온 글 중 아끼는 것을 모아 2019년 첫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물다. 품격과 허영, 쓸모 있음과 없음, 옳음과 현실 사이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3주마다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