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났지만 괴롭힘 피해자들이 실제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회사에 신고를 해도 이후 진행되는 사내 조사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불리한 처지에 몰리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피해 증거를 직접 찾아오라’고 요구하는 곳이 많은 데다, 신고자가 회사를 떠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현행법으로는 재조사 등을 회사에 강제할 수 없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삼성계열 인사관리 전문기업인 ‘멀티캠퍼스’에 다니던 ㄱ씨도 그런 사례다. 그는 다른 부서 상사 ㄴ씨로부터 1년이 넘게 폭언에 시달렸다고 주장하며 2019년 10월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 그러나 회사는 ‘녹취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괴롭힘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ㄱ씨는 이듬해 회사를 나왔고, ㄴ씨는 최근 승진했다.
2019년 신고 당시 ㄱ씨는 ㄴ씨로부터 1년여 동안 겪은 폭언 내용을 에이포(A4)용지 9장 분량 사실확인서에 기록해 인사지원팀에 제출했다. 확인서에는 회사 엘리베이터와 계단 등 괴롭힘을 겪은 장소와 시간은 물론 목격자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적었다. 우울증으로 정신의학과에서 진료와 처방을 받은 기록도 냈다.
ㄱ씨는 15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ㄴ씨는 내가 자기 팀 관할 고객사에 연락했다는 이유로 폭언했다. 그에게 ‘우리 부서장의 지시로 서비스 내용을 설명해준 것’이라고 해명해도 소용없었다. 휴가 중 가족 옆에서까지 전화로 쌍소리를 듣게 돼 괴로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개월간의 자체 조사 후 회사가 낸 결론은 ‘증거 불충분’이었다. ㄱ씨의 피해를 입증할 녹취록이나 영상이 없다는 이유였다. ㄱ씨 동료 3명의 증언은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ㄱ씨는 “‘피해 가능성이 심증적으로는 인정되니 ㄴ씨에게 구두경고 하겠다’는 인사 담당자의 설명을 듣고 조사가 끝났다”고 전했다.
이후 회사는 이 사건이 다시 언급되는 걸 꺼리는 모습도 보였다. ㄴ씨가 최근 승진했는데, 이에 회사 내부망 익명게시판 ‘멀티톡톡’에는 ‘ㄴ씨 욕설에 힘들었다’, ‘폭언을 하고도 승진하다니 놀랍다’는 글들이 올라왔다고 한다. 회사는 지난달 이 게시판을 닫아버렸다. 한 직원은 “멀티톡톡은 경영진이 사내 소통을 강화한다며 만든 게시판이었는데, 회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닫아버려 논란이 됐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멀티캠퍼스 사쪽 관계자는 “당시 (괴롭힘 피해를 입증할) 녹취나 영상자료 등 없이 양쪽의 (상반된) 진술만 있었다”며 “사내 매뉴얼에 따라 피신고자·신고자·목격자 면담을 거쳤고, 사쪽과 임직원 대표 등이 포함된 심의위원회에서 결론을 냈다”고 반박했다. 또 “익명게시판은 개편을 거쳐 다시 열 예정으로 잠시 닫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9년 7월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 통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된 이후로도 ㄱ씨 사례처럼 신고 이후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전체의 절반을 훌쩍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난 3월 직장갑질119가 전국 직장인 1천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직장 내 괴롭힘을 회사에 신고한 사람 중 71.8%가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신고 후 불이익을 겪었다’는 사람도 67.9%였다.
대표적 정보기술(IT) 기업인 네이버에서도 지난 3월 직원 ㄷ씨가 임원 ㄹ씨의 폭언 등에 대한 신고를 접수했지만 회사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뒷말이 나왔다. 지난달 업무 압박을 호소하며 사망한 네이버 직원의 가해자로 지목돼 직무정지 된 인사 중 한 명이 ㄹ씨였기 때문이다. 회사 안팎에서는 “회사가 신고 내용을 세심히 조사해 가해자에 대해 조처를 했다면 더 큰 비극을 막았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신고자였던 ㄷ씨는 “괴롭힘 이후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기록을 제출했고, 조사를 맡은 노무사와의 면담에서 피해 내용을 세세히 알렸다. 그런데도 처분 근거에 대한 설명 없이 ‘인사위원회에 회부하지 않고 종료했다’는 회사의 안내 이메일만 받았다”고 말했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회사가 신고에 대해 적법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과태료 부과할 수 있지만, 직장 내 괴롭힘은 제대로 된 조사를 강제할 근거가 없다”며 “회사가 조치, 조사 의무를 위반했을 때 시정을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을 보완하고, 괴롭힘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는 조사 매뉴얼 등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