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지난 3월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면접 당사자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변화를 일으키려고 하면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게 기득권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잖아요. ‘예민하다’는 말을 너무 신경쓰지 말고 오히려 칭찬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예민한’ 그가 <한겨레> 온라인 칼럼으로 독자를 찾아갑니다. 20대 여성인 자신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독서 경험을 엮어 낸 칼럼 ‘내 이름은 김쿵쾅’ 입니다.
※ ‘쿵쾅’은 단단하고 큰 물건이 서로 부딪칠 때 크게 나는 소리를 뜻합니다. 일부에선 성차별에 분노하고 성평등을 말하는 페미니스트를 가리켜 ‘쿵쾅이’라고 부릅니다. 페미니스트를 입막음하려는 이들이 ‘쿵쾅’의 의미를 변형·독점하려는 시도를 ‘김쿵쾅’이라는 필명을 통해 유쾌하게 맞받아주려 합니다.
얼마 전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깊은 대화를 즐기는, 어떤 반듯한 남자랑요. 모세혈관같이 촘촘한 자상함과 몸 깊숙이 밴 예의와 매너 그리고 아주 간만에 느껴보는 대화의 희열이 참 좋았습니다.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계속 보고 싶다는 그의 고백에 저는 말없이 고개를 두 번 끄덕였습니다. 친구들은 너 같은 대장군한테 그렇게 적극적으로 대시한 걸 보면 그 남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 한번 잘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그와 우연히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그 책을 읽었다며 제게 가져와 보여주는데, 여기저기 포스트잇이 많이 붙어있었습니다. ‘엄청 꼼꼼하게 읽었구나! ’싶어,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가 김지영의 삶에 공감했을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한참 전에 읽은 책인데, 이 책 읽을 당시가 제가 회사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엄청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때거든요. 그래서 읽을 당시에 많은 부분에 공감은 했지만 ‘사는 게 여자만 힘든가?’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지금 읽으면 그때랑은 또 생각이 다를 것 같지만요.” 하고 말이죠. 그리곤 제게 물었습니다. “쿵쾅 씨는 이 책 어떻게 읽었어요?”
“저한테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예요.”
저는 그에게 그간 제가 당했던 여성혐오와 차별의 경험 중 몇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초등학생 때 남학생에게 괴롭힘을 당해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다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 참아야만 했던 일, 제가 백일장마다 상을 타자 남학생들 학부모에게 “남자애들은 원래 글 잘 못 쓰는데 감안해서 수상자를 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며 항의를 받아 몇 번이고 상을 양보해야만 했던 일, 체육 실기 시험에서 제가 남학생보다 기록이 좋자 체육 선생님이 성적 산출 기준을 바꾸었던 일, 대학 시절 토론 대회에서 “여자가 너처럼 기가 세면 시집 못 간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일…. 수도 없지만 그중 몇 가지를 말해줬습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어서 말했습니다.
“김지영이 여기 있었네요…. 제가 남자라서, 여자로 살아보지를 않아서 잘 몰라요. 그러니까 앞으로 알려주세요, 쿵쾅씨가 사는 세상. 알고 싶어요. 쿵쾅씨는 어떤 세상에 사는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제가 사는 세상과 여성으로서의 저의 삶이 알고 싶다는 그의 말에 안심이 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걸 고마워해야 되는 건가’, ‘내가 어디까지 얼마나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 과정에서 혹시나 충돌이 있으면 친절하게 말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내가 친절해야 되나? 권리는 친절한 말, 예쁜 말로 얻어진 게 아닌데…’, ‘원래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죠.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다 친구의 선물로 읽게 된 책이 소설가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이었습니다.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설이 원작입니다. 안은영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상한 ‘젤리’를 볼 수 있는 신비한 눈, 그리고 그 ‘젤리’를 처단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세상에 맞서는 인물입니다. 이런 안은영이라는 인물이 한 말 중에서 이 말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안은영의 저 말은 앞으로 제 연애에 있어 큰 기준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저희 둘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겠지요. 가끔은 그도 여성인 저의 삶 중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고, 저는 그런 그의 모습에 속이 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친절하려고 합니다. 이걸 이해시키는 것이 나의 의무인가 싶어 회의감이 들 때도 있겠지만, 안은영이 말하듯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고,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속는 셈 치고 ‘친절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을 그와의 연애에서 한번 믿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