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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미투’ 이후 일상으로 한 발짝, 예술이 그대를 부축할게요

등록 2022-09-05 12:12수정 2022-09-05 18:28

일상회복 모색하는 ‘상여자의 착지술’ 프로젝트
성폭력 생존자·연대자 위한 예술프로그램 개발
“트라우마 회복을 장기적으로 지원할 제도 없어”
상 여자의 착지술 팀은 당사자·연대자를 대상으로 미투 이후의 일상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상 여자의 착지술 제공
상 여자의 착지술 팀은 당사자·연대자를 대상으로 미투 이후의 일상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상 여자의 착지술 제공
어떤 이에게 수년 전 ‘미투’(Me Too, 나도 고발한다)는 지나간 ‘역사’일지 모르지만, 어떤 이에게 ‘미투’는 여전한 ‘일상’이자 ‘현재’다. 용기를 내 성폭력을 고발한 당사자(생존자), 그들 곁을 끝까지 지켰던 연대자는 여전히 미투가 남긴 크고 작은 상흔을 안고 살아간다. 문화예술계 미투 당사자·연대자 7명이 모여 만든 ‘상(上) 여자의 착지술’(착지술) 팀은 같은 이름의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투’의 정점을 통과한 이들이 ‘미투 이후의 일상’으로 사뿐하고, 안전하게 착지하도록 돕고 싶었다. 자신을 황홀하게도, 황망하게도 만들었던 ‘예술’이란 지지대를 이용해서. 지난 31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댄서스라운지’에서 ‘착지술’ 팀의 구성원 ‘자청’(이하 활동명), ‘나무늘보’, ‘탁’ 세 사람을 만났다.

“지지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라앉아 버리니까”

“미투에서 이기든 지든 내상이 있어요. 제가 연대했던 무용계 미투 사건은 ‘대승’(크게 이김)이라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생존자·연대자에게 내상이 없지 않죠. 당사자는 트라우마에, 연대자는 짙은 소진감에 시달립니다. 이들을 체계적으로 ‘백업’(뒷받침)할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지지가 없으면 가라앉아 버리니까요.”(나무늘보)

나무늘보는 2019년 무용계 미투 당시 ‘오롯# 위드유’(무용계 성폭력 반대 및 성평등 예술환경을 위한 연대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영화감독이자 성폭력 피해 생존자인 마밍이다. 둘은 무용계 미투 사건의 연대 활동을 통해 만났다. 미투 이후 생존자의 일상회복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던 마밍은 당시 팀을 꾸리고 있었고, 비슷한 고민을 하던 나무늘보를 비롯해 탁, 자청, 구구, 늘, 라무와 함께 ‘착지술’팀을 시작했다. 영화·무용·시각예술·웹툰계·출판계 미투 생존자·연대자 7명은 각자의 전문성을 활용해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회복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연대자가 기획하면, 생존자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됐다. “저는 아직 삶이 재건되지 않은 피해자로 참여해, 다른 피해자가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맡았어요.”(출판계 내 성폭력피해 공론화 당사자 ‘탁’)

상(上) 여자의 착지술 팀이 참가자와 함께 ‘움직임’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상 여자의 착지술 제공
상(上) 여자의 착지술 팀이 참가자와 함께 ‘움직임’에 관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상 여자의 착지술 제공
그렇게 탄생한 프로그램이 2020년 11월 시작됐다. 연대자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자청’은 프로그램을 찾아온 사람들이 “(일상회복을 위해) 정말 많은 것들을 시도한 끝에 찾아온 사람”이자 “마지막 힘을 내보고 싶고, 내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정성껏 준비한 프로그램은 코로나19 앞에 자주 멈췄다. 집합금지 탓에 넉달간 진행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탁’은 “오래 쉬어서 과연 (참가자들이) 다음 회차에 와줄까 하는 걱정도 많았는데, 짧은 머리를 어느새 기르고 나타난 분들을 보면서 이 프로그램이 도움을 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나무늘보는 “수업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각자가 복용하는 공황장애, 발작 약 등을 ‘약 쟁반’에 미리 꺼내두는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쟁반 위 약 봉지가 줄어드는 걸 보고 내심 뿌듯했다”고 했다.

‘착지술’ 팀은 올해 상반기 부산과 전주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굵직한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인 만큼 문화예술종사자도 많고, 반성폭력 활동도 활발한 지역이다. 참가자 범위도 성폭력 생존자에서 연대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넓어졌다.

7회짜리 착지술 프로그램의 절반 가량이 무용, 움직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체적 성폭력은 몸의 경계를 침범해 발생하기에, ‘몸’이 일상의 리듬을 되찾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몸도 말을 합니다. 비언어적 표현이죠.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몸 상태는 ‘갑옷 입은 것’과 비슷하다고 해요. 긴장과 경직이 너무 심한 상태라 몸이 말을 못하는 거예요. 몸이 온전한 한 문장을 표현할 수 있도록 여러 단계별 움직임을 시도합니다.”(나무늘보)

성폭력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호소하는 고통 가운데 하나가 극심한 각성에 따른 ‘불면’이다. ‘자청’은 “많은 생존자들이 몸이 과도하게 각성되어 있는 상태라 ‘이완’을 매우 어려워한다”며 “자꾸만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현상을 겪으면서 현재를 자각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움직임·미술·책 같은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현재에 ‘착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프로그램의 공통된 목표”라고 말했다.

“피해자 회복 위한 장기적이고 공적인 지원 필요해”

예술을 빌미로 이뤄진 성착취와 성폭력. 이를 겪은 많은 생존자·연대자는 아예 이 판을 떠나버리기도 한다. 출판계 성폭력 생존자 ‘탁’은 “책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꼴도 보기 싫어서 싱크대 밑으로 모조리 치워버렸을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피해자는 성폭력으로 직업, 직장, 나아가서는 꿈까지 빼앗기는 셈이다. “성폭력이 발생하면 가해자는 돌아오고, 피해자는 떠납니다. 내 일터이고, 내 직업인데 다 잃는 거예요. 부조리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패턴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청)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부터 2018년 연극계, 2019년 무용계 성폭력까지 문화예술계 미투는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유의미한 변화도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성폭력 가해자·단체에 대한 보조금 지원 배제를 명문화했고, 문화예술인도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이수해야만 정부 지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피해자의 트라우마 회복을 장기적으로 지원할 제도가 여전히 없습니다. 피해 발생 시 상담 10회 지원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일상 회복을 위한 장기적인 공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자청)

“성폭력 예방교육 대부분이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온라인 강의로 이뤄지다보니 아쉬운 점이 많아요. (성폭력에 대한 감각은) 몸으로 자각시켜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폭력이 만연한 시대잖아요. 자신의 ‘신체주권’, 신체에 대한 인식 재정립이 필요합니다.”(나무늘보)

‘착지술’ 팀은 오는 17일부터 서울에서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성폭력 피해 생존·연대자라면 지원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 착지술 팀의 페이스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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