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와 공공운수노조 조합원들이 2020년 11월 서울 중구 소공동 한진칼 앞에서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에게 사내 성폭력 사건의 직접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견딜 만하다고 해왔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습니다.”
대한항공 성폭력 피해자 ㄱ씨는 지난 3년 동안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간신히 버텼다고 했다. 더 견딜 수 없겠다 싶을 때 항소심 결과가 나왔다. 소식을 들은 딸이 학원을 마친 뒤 달려와 ㄱ씨를 안으며 말했다. “옳은 것이 결국 이길 줄 알았어.”
지난 10일 ㄱ씨는 대한항공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성폭력 가해자를 징계 없이 사직 처리한 대한항공에 “관리·감독 책임을 하지 않았다”며 사쪽의 책임을 인정했다. ㄱ씨가 억울함을 푸는 데는 소송을 시작하고 3년이 걸렸다.
2017년 직장 상사 ㄴ씨에게 성폭력을 당한 ㄱ씨는 사쪽에 성폭력과 2차 가해 조사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ㄴ씨를 징계하지 않고 사직 처리하겠다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사건에 대한 소문 때문에 ㄱ씨가 불이익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ㄱ씨는 ㄴ씨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ㄴ씨의 사직에 동의했다.
하지만 ㄴ씨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성폭력을 부인했다. 대한항공은 ㄴ씨를 징계 절차에 회부하는 대신 사직 처리했다. ㄱ씨와 대한항공의 법정 다툼 시작이었다. 대한항공은 ㄱ씨가 소송을 낸 지 두 달 뒤, ‘ㄱ씨의 동의를 얻어 ㄴ씨의 사직서를 받았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회사 익명 게시판엔 ‘동의해놓고 왜 소송을 낸 거냐’며 ㄱ씨를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ㄱ씨는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1심은 대한항공에 성범죄 방지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책임만 물어 ㄱ씨에 1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으나, 2심 재판부는 관리 감독 책임까지 인정하며 배상액을 1800만원으로 늘렸다. 재판부는 “(대한항공은) 가해자를 공식적인 징계 절차에 회부할 경우 피해가 공개될 염려가 있다는 점만을 지속해서 강조하면서 무징계 사직을 받아들일 것을 사실상 강권했다”며 “(회사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스스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가장 만족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밝혔다. 무징계 사직 처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1심 판결에서 나간 것이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 회장은 “법과 규정을 무시하고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를 사직 처리한 것은 징계로 볼 수 없고, 사업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 중요한 판례”며 “많은 사업주는 직장 내 성폭력 가해자가 사직하고 나면 의무를 다했다고 여길 가능성이 크지만, 직장 내 성폭력을 겪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회사 쪽의 충분한 정보제공과 절차 안내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ㄱ씨는 “재판하는 동안 피해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회사의 대응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다”며 “항소심 판결로 제 존엄과 가치가 회복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항공은 항소심 결과를 받아들이고, 외부 기관을 통해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점검을 받고 실태를 개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으로 산재 요양 중인 ㄱ씨는 회사에 복귀해 되찾을 일상을 기다리고 있다.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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