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 규탄 시위에서 가면을 쓴 시민들이 여성 혐오적 범죄를 규탄하고,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페미사이드’는 ‘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의 합성어다. 연합뉴스
“자신의 처지가 여성들 때문이라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서울중앙지법 형사23단독 양진호 판사는 지난 8일 ‘신림역 살인예고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실제로 흉기를 주문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아무개(26)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며 이렇게 밝혔다. 검찰도 공소장에서 이씨가 신림역 살인예고 글을 올리기 전인 지난 3월부터 넉달 동안 무려 2096건의 여성 혐오적인 글을 온라인 게시판 등에 쏟아냈다며 강력한 처벌을 요청했던 터였다.
하지만 양 판사는 “글 중 상당 부분이 피고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불만 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며 ‘여성 혐오적 글이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에게 공포를 줬다’는 혐의(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은 이런 1심 판결이 지나치게 가볍다며 지난 14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커져가고 있지만, 정작 법원의 판결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겨레가 ‘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을 통해 확인한 2018년 이후 확정판결 가운데, 양형에 ‘여성 혐오’가 명시적으로 반영된 판결문은 모두 11건뿐이었다. 우리나라에 ‘혐오 범죄’를 처벌하는 법률이 따로 없는데다, 명예훼손죄를 제외하면 양형 기준에 ‘혐오’를 가중처벌 요소로 적극 반영하도록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 관계자는 “많은 범죄에서 ‘비난할 만한 범행 동기’의 예시로 증오감을 들고 있고, ‘그밖에 이에 준하는 경우’라는 규정도 두고 있다”며 “현행 양형 기준상으로도 충분히 혐오 범죄를 범행 동기 가중 사유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명시된 기준이 없다 보니, 비슷한 성격의 사건이라도 판사의 개인 성향에 따라 판결이 엇갈리기도 한다.
이번 신림역 살인예고 사건의 경우, 양 판사는 “이런 내용만으로 피해자들에게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유발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여성 혐오를 범죄 동기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창원지법 형사 3단독 박지연 판사는 2021년 20여명의 여성을 성추행·폭행한 ㄱ씨에게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하며 “여성들은 언제든지 자신도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상당한 불안감과 공포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혐오 범죄는 일반 범죄에 비해 파급력이 크고 재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혐오 범죄 예방법’ 등을 만들어 혐오 범죄를 가중처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혐오 범죄는 특정 집단에 소속됐다는 이유로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범죄”라며 “지속적으로 선동하고 확산되는 만큼 혐오 범죄는 더 엄중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는 이와 관련해 “혐오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법 입법이 최선이지만, (현재 여건상 어렵다면) 양형 기준에 혐오 범죄를 무겁게 처벌하도록 기준을 구체적으로 마련하는 것도 차선책으로 고려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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