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물 제작 과정에서 세심하게 검토하지 못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지난달 26일 0시1분, 넥슨은 자사의 게임 ‘메이플스토리’ 누리집에 이런 사과문을 올렸다. 사흘 전 게임의 홍보 영상이 공개되고, 전날 밤 10시께 일부 남초 사이트에 영상에 ‘남성 혐오’를 상징하는 ‘집게손가락’ 모양이 삽입됐다는 논란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해당 영상은 즉각 내려졌다. 홍보 영상 하청을 맡았던 ‘스튜디오 뿌리’는 물론, 비슷한 ‘의혹’이 제기된 ‘던전앤파이터’와 ‘블루 아카이브’, ‘에픽세븐’, ‘아우터플레인’, ‘이터널 리턴’ 등 다른 게임 게시판에도 줄줄이 사과문이 올라왔다. 남혐 논란이 제기돼, 게임사가 사과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두어시간 남짓이다.
사과까지 두어시간 남짓…“유저 반응을 듣는 건 당연”
유저의 반응에 귀기울이는 것이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넥슨의 관계자 ㄱ씨는 속전속결의 결정이 이뤄진 배경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동조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한 평가를 묻자 곤혹스럽다는 듯 즉답은 피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이 안 되는 항의였지만 회사 입장에선 시끄러운 게 좋을 게 없죠.” 게임업계 매출 상위 3위권 내 다른 회사 관계자 ㄴ씨도 ‘동병상련’의 심정을 토로했다. 행여 꼬투리 잡힐라, 그의 회사도 게임 이미지 수정에 들어갔다. “물건 모양이 집게손가락 같다는 항의가 있었어요. ‘아, 이런 것까지 문제가 될까’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결국 고쳤어요. 문제를 삼으려면 뭐라도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시기니까요.”
게임업계는 지금 ‘페미 사상 검증’이 수시로 이뤄지는 상시적 전쟁터다. 게임업계에서 15년 이상 기획자로 일한 ㄷ씨는 “2016년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 이후 업계에선 ‘넥슨도 저렇게 하는데’라는 분위기가 생겼다”며 “이용자들도 대놓고 ‘넥슨도 했는데, 너희 회사는 왜 사과하지 않냐’는 식으로 항의한다”고 하소연했다. ‘이용자들이 결집해 요구하면 기업이 들어준다’는 공식이 먹히고 있는 것이다.
유저-회사 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힘 세진 게임 유저들
게임 회사들은 다른 소비재 기업들에 비해 유독 유저들의 요구를 즉각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유저 대 유저’, ‘유저 대 회사’ 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강한 게임 산업의 특성이 반영돼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게임 유저들은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프로슈머’(생산자+고객) 역할을 하고 있다”며 “게임사가 유저에게 자사 정책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2003년 시작된 메이플스토리 같은 ‘장수’ 게임의 경우, ‘함께 만든 서비스’란 의식이 강해 유저들이 목소리가 더 크게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모바일 게임’ 시대로 접어들며 게임의 업데이트 주기가 주·월 단위로 짧아진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ㄷ씨는 “게임에 대한 유저들의 피드백이 활발해지는 주기가 짧아지면서, 회사가 유저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게 됐다”고 말했다. 업데이트 이후 유저들의 불만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경우, 매출 및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ㄷ씨는 2016년 넥슨의 성우 교체 사건 당시를 떠올리며 “당시 커뮤니티에 (성우를 교체하지 않으면) ‘게임을 접겠다’고 인증한 유저들이 게임에 쓴 누적액이 (개인당) 수백만원이 넘었고, 중고차 한 대값이 들어간 캐릭터를 없애는 화형식을 한 사람마저 있었다”고 전했다.
넥슨의 관계자 ㄹ씨도 “게임은 실물이 없어 기분이 나쁘면 안 사면 그만이라, (이용자들의 불만이 커지면) 매출이 10분의 1 수준으로도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저의 불만은 곧 생존의 문제”라며 “회사는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논란이 되는 모든 이슈에 최대한 사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 1위 넥슨은 이번 집게손가락 논란이 불거진 이후, “우리 사회의 긍정적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동시에 영상을 만든 하청업체 뿌리 쪽에 사실관계 확인에 앞서 ‘최대한 빨리 사과문을 올려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실상 ‘모든 차별과 혐오에 반대한다’는 말로 뭉뚱그려 ‘페미 사상 검증’에 나선 손가락 탐정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셈이다. 김수아 서울대 부교수(언론정보학과 여성학협동과정)는 이 점을 지적하며 “넥슨의 말이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게임 캐릭터에 장애인이나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아들여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말했다.
넥슨이 최근 ‘여성비하 논란’ 관련 소송에서 승소한 유투버 보겸을 던전앤파이터 모델로 기용한 것은 이런 의심에 부채질을 한다. 논란을 불렀던 ‘보이루’란 인삿말이 법원 판결대로 여성 비하가 아니라 단순한 ‘보겸+하이루’의 합성어라고 할지라도, 굳이 이 예민한 시점에 과거 ‘교제폭력’ 논란이 있던 보겸을 기용했어야 하냐는 지적이 일부 누리꾼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보겸이 승소했듯, 넥슨도 페미 검증 논란에 동조하고 있다는 비판에 정면 승부하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게 아니냐는 것이다.
또 지난달 공개된 넥슨의 게임 ‘블루아카이브’에선 캐릭터의 대사로 ‘5시23분’이란 자막이 등장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 표현은 남초 사이트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데 사용되는 혐오성 ‘밈’이다. 김유리 전국여성노동조합 조직국장은 “이런 사례들만 보더라도, 넥슨이 일부 유저들의 의견을 취사선택해서 혐오를 혐오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넥슨은 논란이 되자 최근 이 자막을 ‘5시20분이 막 지난’으로 수정했다.
업계 안팎에선 넥슨을 비롯한 게임업체들이 과대표된 일부 남초 커뮤니티 여론과 목소리 큰 일부 ‘고래 유저’(과금을 많이 한 유저)에 지나치게 경도된 탓에,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넥슨은 몇 년 전부터 여론 분석프로그램인 ‘유저보이스’를 만들어 게임에 대한 각 커뮤니티의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대상 커뮤니티가 디시인사이드나 루리웹 등 주로 남초 사이트인 것으로 알려졌다. 넥슨의 전직 관계자 ㅁ씨는 “작정한 것은 아니고, 게임 관련 내용을 다루는 사이트 대다수가 남초 사이트인데다가 여초 사이트는 가입 인증이 까다로워 모니터링이 쉽지 않은 사정도 있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넥슨 뿐 아니라 다른 게임 회사들도 대부분 이런 모니터링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연구 웹진 ‘포워드’(Fwd)의 이민주 연구자는 “(그 결과) 그들의 의견만을 소비자 의견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독성 문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게임업계의 이런 편향된 대응이 회사의 평판을 훼손하고, 이용자들의 이탈을 불러 장기적으로는 회사의 경쟁력을 깎아먹는 요인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주목되는 건 게임 이용률은 남성(75.3%)이나 여성(73.4%) 모두 비슷(한국콘텐츠진흥원 ‘2022 게임이용자 실태조사’)한데, 어째서 페미 검증 논란을 비판하는 여성 이용자들의 목소리에는 왜 귀 기울이지 않느냐는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는 점이다.
‘프로젝트 문’(프문)의 게임 ‘림버스 컴퍼니’ 유저였던 ㅂ씨도 이런 이들 중 하나다. 그는 지난 7월 말, 프문이 페미 검증 논란에 몰린 게임 스토리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을 종료한 데 항의해 게임을 탈퇴했다. 탈퇴에 앞서 그는 프문이 운영하는 테마카페 ‘햄햄팡팡’을 찾아가 항의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2018년쯤이었나, 프문이 ‘어떤 사상 혐오에도 대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페미 검증에 반응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믿고 게임을 시작했는데,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몇 억씩 ‘현질’(온라인 게임의 아이템을 현금을 주고 사는 것)하는 고래 유저 수준까진 아닐지라도, ㅂ씨는 프문의 게임 3종을 하며 아이템 선물하기, 굿즈 구매, ‘햄햄팡팡’ 이용 등으로 600만원이 넘는 돈을 쓴 ‘충성’ 유저였다.
페미 검증에 동조한 뒤 일러스트레이터 계약 해지 사태 이후 림버스 컴퍼니의 매출은 도리어 급격히 하락했다. 한국게임소비자협회에 따르면, 림버스 컴퍼니의 매출 추정치는 7월 81만6천달러(10억6천만원)에서 27만7천달러로 한 달 사이 66%나 급락했다. 또 게임 월간실사용자수(MAU)도 7월 53위에서 8월 137위로 떨어졌다. 11월 현재 162위에 머무른다.
여론 악화는 비단 국내에만 국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매출 순위 10위권 내 게임 회사 관계자 ㅅ씨는 “최근 집게손가락 사태가 해외 시장에 빠르게 알려지고 있다”며 “해외 유저들 사이에서 ‘한국 게임을 하면 안 되겠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달 미국의 소셜뉴스 커뮤니티 레딧에선 ‘넥슨이 집게손가락 논란에 대해 여성 애니메이터에게 책임을 전가했는데, 손가락을 그린 것은 다른 남성이었다’는 ‘엑스’(X·옛 트위터) 메시지를 두고 격렬한 댓글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수아 교수는 “(페미 퇴출을 요구하는) 악성 유저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게 되면, 장기적으로 게임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기업의 손해가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오세진 기자
5sej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