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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급한 장모-느긋한 사위 ‘찰떡 콤비’

등록 2006-07-18 19:52수정 2006-07-19 13:02

2050 여성살이 /

“아가, 평광동에 도라지꽃 피었다.” 흥분한 친정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다. 올해 여든살이신 할머니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 흰색과 보라색이 어울려 피는 도라지꽃의 청초함을 여름 꽃 중 최고로 치는 엄마껜 도라지꽃이 피어야 여름이 제대로 온 것이다.

분당 아파트촌에서 아들네와 살던 엄마는 몇 해 전 대구에 주말부부로 혼자 사는 내 남편 집으로 가셨다. 아니, 사과 농사로 유명한 골짜기 시골스런 집에 딸린 텃밭에 반해 아파트 생활을 버린 것이다. 전라도의 한 농삿집에서 태어나셨지만 월급쟁이 남편을 따라 사느라 농사를 직접 지어본 경험은 전무하신 엄마. “놀려두는 땅을 참을 수 없다”는 농사본능이 발동했던지 해마다 조금씩 손수 경작 면적을 넓혀가고 계신다. 첫해엔 상추, 들깨와 고추 모종 몇 개로 시작된 텃밭농사가 급기야 자급자족 체제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덕분에 신이 난 건 내 남편이자 울 엄마의 둘째 사위인 송아무개씨. 주말 부부 신세의 외로움을 덜어준 장모님의 합류로 아침저녁 따뜻한 밥을 얻어 먹게 되는 호강을 누리게 되었다. 그뿐인가? 텃밭 농사에 대한 장모님의 솟구치는 열정을 온갖 씨앗 구입과 작목 연구조사 활동으로 뒷받침한 공로로 다른 사위들을 제치고 가장 총애받는 사위로 부상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도 더덕을 사다 옮겨 심으면 다음 해 제대로 자랄 것인지, 텃밭 귀퉁이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듯한 호두나무를 살릴 방안 등 현안에 대해 둘은 머리를 맞대고 초보 영농 세미나를 전개한다.

애초 장모님의 텃밭 열정에 불을 지른 건 사위였다. 70대에 “십년만 젊었어도 운전면허증에 도전했을 것”이라는 장모님의 탄식에서 자기 개발 욕구를 간파하고 텃밭 농사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이다. 엄마로선 아들네를 떠나 혼자 사는 사위 집에 살러 가는 건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럼에도 평소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고약한’ 구호를 엄청 싫어하셨던 엄마는 결단을 내리셨다. 나 대신 대구집 살림을 떠맡는 동시에 사위를 아들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를 사위라고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사안에도 ‘아들에게 하듯’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파자마를 벗어 몸만 쏙 빠져나가는 버릇이나 뭐든 어질러놓고도 요리조리 피해서 태연히 걸어다니는 통에 발디딜 틈이 점차 없어지는 방의 꼬락서니를 참지 못하신 엄마가 사위를 어린아이 다루듯 ‘훈육’하는 모습은 우려와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곤 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5년 동안 텃밭농사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사이 장모-사위 대박 콤비가 탄생했다. 성미 급한 장모님과 느리고 느긋한 사위가 함께 가는 풍경 속엔 텃밭 농사일과 동네 사교계 활동을 둘러싼 풍부한 화젯거리가 있었다. 서로에 대한 짜증 섞인 적응기간을 거쳐 마침내 사위 겸 아들을 얻게 된 울 엄마 박 여사, 오늘도 전화통에 대고 사위인지 아들인지 헷갈리는 아무개의 험담과 자랑에 열을 올리신다.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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