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소설가
2050 여성살이 /
나는 지금 딸과 유럽을 여행 중이다. 우리 나이 마흔에 나고 자란 이 땅을 처음 떠났고, 이번이 세번째다. 처음, 떠나야 한다는 당위만으로 구체적인 매뉴얼도 없이 초등학생이던 딸의 손을 잡고 무작정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미토리 룸이 뭔지도 몰랐던 생초보 여행객은 유스호스텔을 전전할 거면서도 제 꼬라지를 모르고 신데렐라라도 되는 듯 돌덩이 가방엔 원피스까지 챙겨 갔었다. 낭패를 겪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 또한 무지개 빛깔 찬란한 무용담으로 바뀌는 게 여행의 재미다.
그 중 하나. 혼숙의 추억이다. 런던 북동쪽 스탠스테드공항에 도착해 하이드파크 여인숙을 찾아낸 뒤 6인실에 들어섰을 땐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철제 계단을 붙잡고 이층 침상으로 오르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달빛인지 불빛인지에 드러나는 다리의 근육이 남달랐던 것이다. 잠에 빠져가는 애를 흔들었다. “저 사람 다리 좀 봐!” “왜 또?” “남자 같지 않니?” “뭐, 근육이 있는 여자인가부지. 얼른 자!” “아니야, 저 사람 남자야! 가서 확인해 봐야 해!” “남자면 뭐 어때서? 그냥 자!” “엄마는 남자랑 한 방에서 잠 못 자!”
애를 기어이 깨워 접수직원에게 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잖아, 혹시, 우리 방이 남녀혼합이라도 되니? 그렇단다. 어둠속에서도 내 눈썰미는 정확했다. 탄복도 잠깐, 주저 없이 요구했다. “그럼, 우리는 여성 전용방으로 옮겨 줘.” “이 호스텔은 싱글 섹스 룸은 한 군데도 없거든!” 애가 잘쓰는 표현대로 ‘허걱’이다. 이미 4일 묵을 돈을 다 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우리 방엔 우리 모녀만 여자였다. 아침에 일어나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애들은 극히 자연스럽게 ‘헬로우’라고 인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요부위만 가린 낯선 남자들이랑 한 방에서 네 밤을 ‘혼숙’했지만, 걱정했던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여행이 중반을 넘어서자 샤워실에서 박스셔츠만 걸치고 방으로 유유히 돌아올 정도가 됐고, 매일 저녁 새롭게 달라지는 사람들과 만남과 헤어짐 파티를 하며 더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을 풍경, 하지만 이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 이 곳이 오히려 한국보다 성범죄율이 낮단다.
북유럽의 호스텔 사이트에는 미리부터 고지되어 있었다, 도미토리 룸에 싱글섹스 룸은 없다고. 이번엔 한 방의 젊은 남자가 살인 미소를 지으며 오늘 뭐 할 거냐고 물어 오더라도 싹둑 자르진 말아야지. 어깨가 닿을락말락 스쳐가도, 서커스 소녀마냥 어깨를 접지 말아야지. 벌써부터 설레인다.
김연/소설가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