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 책임자 “네가 참아라” 되레 훈계
인권위에 피해 진정 매년 늘어 작년 163건
여성계 “근본적 해결방안은 고용평등”
인권위에 피해 진정 매년 늘어 작년 163건
여성계 “근본적 해결방안은 고용평등”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회사에 입사했던 김수정(가명·여·22)씨는 직장에서 성희롱에 시달렸다고 했다. 유부남인 대리 2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만지는가 하면, 노래방에서 “블루스를 추자”며 끌어내어 멋대로 포옹하기도 했다. 따로 불러 “사귀자”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불이익을 당할까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김씨는 회사 성희롱 실태 조사 때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적었다.
하지만 회사 쪽 대응은 기대와는 달랐다. 관리 책임이 문제될까 두려웠던 책임자는 “네가 참아라”며 김씨의 성희롱 피해를 덮으려고 했다. 책임자는 오히려 김씨를 따로 만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유부남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는 등 스스로 성희롱을 하기까지 했다.
말 못할 고통에 신경쇠약 증세로 입원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는 김씨는 지난해 4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노동조합에 이 사실을 알렸다. 김씨 사건을 수임한 사단법인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증인들이 증언하기를 꺼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난해 9월 최초 가해자인 대리 2명은 다른 부서로 인사 이동 조처됐고, 사건을 무마하려던 책임자는 해고 처분을 받았다.
국가인권위는 이 사건 결정문에서 “회사는 성희롱 예방 교육을 정기적으로 해 왔지만, 성희롱 예방 교육만으로는 성차별이나 성희롱에 관해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성희롱 발생 때 이를 신속히 구제할 수 있는 절차와 조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행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에서의 지위·업무를 이용해 성적인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성희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1999년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이 시행되면서부터 성희롱 가해자 징계 등 사업자의 적절한 조처와 사전 예방을 의무로 명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업자는 1년에 한 차례, 최소 1시간 이상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해야 하며, 하지 않으면 3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이런 법률·제도가 있는데도, 직장내 성희롱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직장내 성희롱 진정 사건은 모두 163건으로, 2005년 62건, 2006년 104건보다 훨씬 늘어났다. 정희진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사무처장은 “내담자의 80% 가량이 직장내 성희롱 문제로 찾아온다”고 말했다. 여성노동 상담전화인 ‘평등의 전화’(서울 : 3141-9090)에 접수된 성희롱 상담은 2005년엔 전체 상담의 9.2%를 차지했고, 지난해에도 11.1%에 이르렀다.
직장내 성희롱 예방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7년 성희롱 예방 교육 자율점검을 한 사업장 8041곳 가운데 1788곳(22.2%)이 예방 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노동부는 밝혔다.
문강분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회장(공인노무사)은 “노동 현장이 법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조합이 회사와 단체협약을 맺을 때, 성희롱 관련 실태 조사와 예방 교육 등을 하도록 하는 등 실질적인 예방·구제 조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희롱은 근본적으로 직장 안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며 “실질적인 고용 평등을 이룰 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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