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난 윤석남 화가가 조선시대 기생 이매창을 소재로 한 자신의 설치미술 작품 <종소리>(2002) 옆에 섰다. ‘이화우 흩뿌릴 제’로 시작하는 시조의 저자로 알려진 이매창과 작가 자신이 푸른종을 흔들며 만나는 장면을 버려진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화가 윤석남
화가 윤석남
여성의 욕망은 불온하다. 전업주부로 사는 중년 여성들의 욕망은 더욱 불온하다. 배고픈 자식들 건사하느라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시대도 아닌데 짜장면, 탕수육에 새우볶음밥까지 꾸역꾸역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기,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헛헛해하는 여자들이 있다. ‘하는 일이 없으니 배가 불러 저런다’는 경멸에 찬 시선에도 딱히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해 여자들은 외롭다. 스스로도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릴 뿐.
허기진 욕망을 ‘갖고 싶은 것’으로 채워보려 애쓰지만 ‘되고 싶은 것’을 잃은 영혼은 공허하다.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은 비교적 안전하다. 세상은 ‘된장녀’를 경멸하면서도 양성하니까. ‘되고 싶은 것’을 욕망하면 위험해진다. 체제의 안전선 밖으로 언제 뛰쳐나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여자들을, 세상은 ‘미친년’으로 간주한다.
‘우아한 미친년’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있다. 화가 윤석남(76)에 대해서 도쿄경제대 서경식 교수가 쓴 평론의 제목이다. 1939년 만주 봉천에서 출생한 윤석남은,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직장생활 중에 성균관대 영문과에 야간으로 입학해서 1년 남짓 공부한 적은 있지만,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도, 화구를 잡아본 적도 없는 평범한 주부였다. 안정된 밥벌이를 하는 남자의 아내로, 시어머니 모시고, 유치원생 딸을 키우며 살던 그는 만 마흔살이 되던 해 전날 받은 월급봉투를 몽땅 털어 화구(畵具)를 사가지고 와서는 “나, 그림 해야겠다”고 선언했다. 그로부터 햇수로 37년째, 윤석남은 초인적인 작업량과 부단한 실험정신으로 드로잉과 페인팅, 시화와 공예, 조각, 설치 등 다양한 양식을 넘나들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작가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원로작가 초청전 형식으로 열리고 있는 ‘윤석남♥심장’전을 찾아갔다. 한가한 평일 오후, 전시실에 들어서자 시선을 끄는 건 핑크빛 조명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높이 3m 지름 2m의 거대한 심장이었다.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허난설헌이 연꽃 줄기를 가슴에 품고 서 있고, 조선의 기생이자 시인 이매창이 긴 팔을 내밀어 푸른 종을 들고 서 있다. 너와 지붕 조각 하나하나에 그려진 여인들의 초상, 바닥을 뚫고 올라온 죽순처럼 도열한 수백개의 여성 목상들, 그리고 그의 첫번째 모델이자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던 어머니 연작….
윤석남의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여성과 생명, 모성과 자매애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이유를 알 만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주의는 비장하고 저돌적이기보다는, 따뜻하고 솔직하며 관대하다. 전투적 당파성이 아니라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는 여성주의, 부드러워서 더 강하고 신뢰가 갔다. 전시를 둘러보고 난 뒤 윤석남 작가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지난 6월9일 오전 미술관 앞에 나타난 그는 반바지에 샌들, 옥색 스카프에 헝겊가방을 멘 멋쟁이 할머니였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부담스러워요!
-그러고 보니,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미술계의 남성 독점이 유독 심한 것 같습니다. 문학이나 연극, 무용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엔 음악이나 지휘 분야에서도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말이에요.
“미술 분야에서도 많아졌어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해서 공공미술관 관장을 여성이 맡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게 일본만 해도 아주 보기 드문 일이거든요.”
-그래도 전업 작가 경우에는….
“적죠. 나는 어려서부터 천경자나 박래현 같은 훌륭한 여성 작가들 작품을 보면서 영감을 키웠지만… 여전히 전업작가 중 여성의 비율은 아주 작아요. 왠지 아세요? 여성 작가 작품은 잘 안 팔리거든요. 장래성이 없다고들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장래 투자가치가 없다?
“남성 작가들처럼 80~90살 될 때까지 여성 작가들이 계속 좋은 작업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깊은 의구심들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게 걸림돌이 되겠지요. 내가 이제 일흔일곱인데 여성 화가 중에 굉장히 많은 나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남성들은 팔십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작업하잖아요.”
-여성 작가들은 왜 더 안 하시죠? 평균수명도 여자가 더 긴데.
“모르겠어, 왜 그러는지. 물어보면 무릎도 쑤시고 여기저기 아프다고…. 근데 나이 들면 남성들은 안 아픈가요? 어떤 때는 그게 참 쓸쓸해요. 이 나이 돼서 동료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내 아래 세대는 달라요. 이불이나 김수자같이 세계적으로 확 뻗어나가는 여성 작가들도 있으니까.”
-드로잉 작품에 보면 작가 서명을 ‘윤석남’이 아니라 ‘윤원석남’이라고 쓰셨어요. 어머니 원정숙씨의 성을 넣으신 거죠? 부모님 양성을 쓰는 여성 인사 중에 최고령자이실 것 같아요.
“(반색하고 놀라며) 아, 그래요?”
-그럴걸요.
“(박수 치며) 하하하, 그렇구나. 사실 여성주의가 뭔지도 잘 몰랐다가 80년대 중반에 ‘또 하나의 문화’(여성학 연구자, 예술가들의 모임) 사람들 만나서 페미니즘 공부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요, 97년부터 ‘여성문화예술기획’(여성문화운동단체) 이사장을 한 10년 맡았는데 그거 하면서 엄마 성(姓) 같이 쓰기 운동에 합류했어요.”
-‘여성주의 미술(Feminist art)의 대모’로 불리시는데, 여성 미술이란 게 뭐지요?
“80년대 중반, 한국 화단에 대변혁이 일어나잖아요. 민중미술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아, 이게 정말 나하고 맘이 잘 맞아. 그래서 그 1세대로 들어갔어요.”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 대신, 윤석남은 자신이 여성주의와 만나게 된 이력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1986년 민중미술협의회가 발족하고 여성미술분과가 만들어질 때 김인순, 김진숙 작가 등과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민중미술 진영에서는 여성 노동자나 기층 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윤석남도 그런 자세의 올바름에 마음이 끌렸지만, 그 경향성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했다.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도 했다. 황학동시장에 가서 전자부품으로 쓰는 칩을 왕창 사서는 그걸로 여성 노동자의 토르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왜 그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죠?
“아, 거짓말하는 거 같아서. 내가 노동자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노동계급이 아닌데 노동계급인 척할 수가 없었어요. 스스로 용서가 안 되더라구. 내가 모르는 얘기 말고, 그냥 내 주변의 이야기,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생각했어요. 솔직히 난 무슨 유파에 함몰되거나 무슨 그룹으로 대변되는 건 아닌 것 같아. 민중미술에 완전히 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수미만 추구하는 현대미술도 아니고. 나를 끼워 넣을 데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여성 미술이란 장르로 날 얘기하는데, 그건 고맙죠. 어차피 난 죽을 때까지 여성 얘길 할 거니깐. 근데 대모라는 말은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부담스러워요.(웃음)”
평범한 주부로 시어머니 모시고
유치원생 딸을 키우며 살다가
마흔살 되던 해 어느날 전날 받은
월급봉투 몽땅 털어 화구를 사와
“나 그림 해야겠다” 선언을 하다 미술 입문하고 ‘어머니’에 천착
‘월하의 맹서’ 감독 윤백남 만나
후실로 들어와 과부가 된 뒤
여섯 남매 키워낸 원정숙씨는
온몸으로 삶의 희망 보여준 전범
핑크룸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평범한 중산층으로 살던 40대 주부가 어떻게 민중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때 구반포 아파트에 사실 때죠?
“맞아요. 구반포 중에서도 제일 럭셔리한 복층 아파트. 그러니까 이건 중산층에서도 약간 올라간 계급이죠. 근데 참 이상한 게 그때나 지금이나 난 재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남편이 돈 벌어서 시어머니 모시고 좀더 넓은 데로 가자 해서 따라간 것뿐이지. 거창하게 체제에 대한 저항 같은 걸 꿈꾼 건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왜 부자는 잘살고 가난한 사람은 굶주릴까, 다 같이 골고루 잘사는 세상이 될 순 없을까’ 하는 공상을 했어요. 아마 아버지 영향이 클 거예요. 반골 기질이 강한 분이었거든요.”
윤석남의 아버지 윤백남(1888~1954)은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만든 감독이자, 나운규를 발탁해서 <심청전>을 찍은 ‘윤백남 프로덕션’의 대표였다. ‘민중극단’을 조직한 신극운동의 선구자였고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대도전>(大盜傳)을 연재한 인기 작가이기도 했다. <민중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낼 만큼 사회주의적 색채도 강했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한계와 모순도 잘 아는 분이었다. 살림은 늘 곤궁했다. 방탕함이라곤 모르는 신실한 분이었지만 돈에 얽매이는 걸 우세스럽게 여기셨다. 6·25가 나서 피난을 갔다 돌아오니 아버지가 사둔 신설동 집에 피난민이 가득했는데, “저이들을 어떻게 내쫓느냐?”며 암말 없이 집문서를 버리고 셋방을 구한 분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다가 윤석남이 열여섯살 때 타계하셨다.
-직장에 다니다가 스물여덟에 결혼하셨는데, 당시로선 늦은 나이죠?
“연애는 오래 했어요. 스물둘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6년을 사귄 거죠. 처음 만날 때 남편은 서울공대 4학년이었어요. 군대 제대하고 돌아와 보증금 만삼천원에 월세 천삼백원짜리, 부엌도 없는 사글세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했어요. 시어머니 모시고 살았죠.”
-단칸방에서 시어머니랑 같이 살아요? 신혼부부가?
“방 하나에서 같이 살았죠.(웃음)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빈손으로 시작한 남편의 사업은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했고, 단칸 월세방에서 방 두칸짜리 전세로, 다시 24평 아파트로 살림도 불려갔다. 오랫동안 아이 소식이 없더니 결혼 8년 만에 임신이 되어서 서른여섯에 아이도 낳았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했지만, 윤석남은 깊은 우울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예쁜 딸도 얻으셨는데 뭐가 문제였죠?
“열렬하게 사랑해서 결혼한 거잖아요. 근데 2년쯤 지나니까 삶의 의미가 없어지더라고. 나는 왜 살고 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남편은 출장 가면 보름씩 있어요. 어머니 때문에 할 수 없이 밥은 하지. 냉장고에 먹을 게 다 떨어질 때까지 밖에도 안 나가고. 햇빛도 보기 싫었어요. 그러곤 집에 있는 책을 읽고 또 읽는 거지. <닥터 지바고>를 한 여섯번은 읽었을 거야. 난 왜 살고 있지? 삶의 의미가 없었어요. 일종의 우울증이었겠지.”
-아이가 위안이 되지 않던가요? 귀하게 얻은 자식인데.
“예쁘지. 그런데 어떤 그리움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살아야 될 절실한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아기는 낳았지만 그걸로 채워지진 않더라구. 모르겠다. 그 이유는.”
훗날 윤석남은 자신의 당시 삶을 <핑크룸> 연작으로 형상화했다. 번쩍이는 핑크 공단으로 덮인 값비싼 서양 소파, 보석 같은 자개가 박힌 옷을 입고 소파에 붙박인 무기력한 여성. 소파를 찢고 독버섯처럼 위험한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데,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위태로운 의자 위에 똑바로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깔린 핑크 구슬 위에는 똑바로 설 수도 없는 화려하고 허망한 삶의 진공상태.
-그 핑크 소파를 보는 순간 박완서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가 떠올랐어요. 중산층 여성의 위선과 자괴감을 그린.
“박완서씨도 나하고 비슷했겠죠. 나는 미술을 시작하고도 그렇게 내 얘길 하기까지 십몇년이 걸렸지만.”
‘임서기간 20년’ 말 듣고 서예에 손들다
질식할 것 같던 핑크 소파 위의 삶에 첫 숨통을 틔워준 것은 서예였다. 친구 하나가, 시인 박두진 선생이 서예를 가르친다며 같이 배워보지 않겠냐고 했다. 서예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반갑게 따라나섰다. 취미로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필사의 안간힘 같았다. 한일(一)자 하나를 써오라고 하면 남들은 네댓장 써오는 걸 윤석남은 신문지와 한지에 날이 새도록 수백장을 써 갔다.
-그런데 왜 4년간 하던 서예를 중단하고 그림으로 바꿨어요?
“열심히 하면 창작하고도 연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임서기간이 20년은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무슨 기간이요?
“임서기간(臨書其間). 선생님이 써 준 문자를 서체 그대로 베껴서 연습하는 기간. 그걸 20년 해야 된다고 하니까 아득하데. 그래서 그날로 손들었어. 우연히 그때 마침 홍대 나온 친구 동생을 만났는데, 내가 하소연을 했지. ‘나는 말이야,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글씨는 임서가 20년이래’ 하니까 ‘그럼 언니 그림 그려, 내가 선생님 소개해 줄게’ 하더라구.”
그길로 당장 뛰어나가 화구 일체를 장만했다. 전날 받은 남편의 한달치 월급을 몽땅 털어 넣어서. 그러나 소개받은 이종무 화백에게서 받는 개인교습은 두달을 넘기지 못했다.
-왜 그만두셨어요?
“화실에 가보니까 부인들이 쫙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손바닥을 가리키며) 요만한 캔버스에 오부작오부작 그리고 있더라고. 난 대뜸 50호(116.7㎝×90.9㎝)짜리를 사가지고 갔거든. 선생님이 기절을 하시려고 해. ‘아니, 유화를 해봤어요?’ ‘아니 안 해봤는데요’ 했지.(웃음)”
두달쯤 배우니 혼자서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맘대로 휘둘러보고 싶어” 시작한 미술이었으니까. 제일 그리고 싶은 대상을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어머니였다. 일주일에 두번씩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집으로 친정어머니를 오시라 해서 그리고 또 그렸다. 그림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지인의 권유로 82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단 일주일간의 전시회였지만 예상밖의 호평을 받았다. 전시회가 끝나고 남편이 물었다.
“당신, 그림 계속 그릴 거야?”
“물론이지.”
윤석남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를 떼어놓고 미국에 다녀오라고 권한 건 남편이었다. 윤석남은 83년부터 1년간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수학했다.
-서울대와 홍대 미대의 양대 산맥이 버티고 선 화단에서 독학으로 익히다시피 한 그림으로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글쎄, 오히려 득이 되지 않았을까? 어느 쪽에도 안 속하니까 견제받을 일도 없고. 아니, 솔직히 얘기할게요. 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아이 돈 케어(I don’t care). 끌어주든지 말든지! 근데 그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하하하, 그게 제 질문입니다. 그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냐고요?
“나도 모르겠어요. 처음 그림 그리기 시작할 때는 누구나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죠. 근데 그게 내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아. 그냥… 내가 살아갈 어떤 방법을 찾았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 그게 제일 우선이었죠.”
-초기에 신문에 소개될 때는 ‘규수작가’ ‘주부화가’로 호명되었던데요.
“그런 호칭 많이 썼어요. 정말 거지 같았어.(웃음)”
-늦게 시작했지만 화가로서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예술이라는 게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99퍼센트는 노력이라고 난 생각해요. 미술이라는 건, 자기를 들여다보고 관찰하면서 깎고 또 되새기는 작업의 총체적인 결과물이거든요.”
허난설헌·김만덕·고정희 같은
역사 속 여성들과의 공감 표현
유기견 키우는 동시대 여성에
헌사 보낸 1025마리 개 조각작품
만들며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윤석남을 숨조이던 ‘핑크 소파’가
김만덕 눈물 닮은 ‘핑크빛 심장’으로
거듭나는 데 40년이 걸렸다.
윤석남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대, 아직도 그 소파에 매달리는가” 첩의 자식? 그건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서 윤석남은 어떤 답을 얻었을까? 그가 미술에 입문하고 제일 먼저 천착한 주제는 그의 어머니 원정숙(1915~2010)이었다.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하숙집 딸로 스물일곱살 차이가 나는 윤백남을 만나 그의 후실이 되고, 서른아홉에 과부가 되어 여섯 남매를 억척스레 키워낸 어머니. 아흔다섯살에 작고하실 때까지 진심으로 세상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셨던 여인. 공장 일에 밭일까지 하면서도 ‘센베이’ 한봉지 사들고 밤늦게 돌아와 자는 애들을 깨워 카드놀이를 하자셨던 낙천적인 엄마.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학력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즐겨 읽으시던 깨어 있는 여성이었다.
-선생님 작품에 흐르는 ‘여성성’의 영감의 원천은 어머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생적이고 가족에게 무한 헌신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은, 굉장히 가부장적이고 반여성적인 작가들이 즐겨 찾는 테마이기도 하단 말이죠.
“나도 그것 때문에 작업하면서 굉장히 고민했어요. 내가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을 가부장적인 시스템에 묶어놓는 건 아닌가…. 근데 자세히 보면 우리 엄마는 희생만 하고 산 가련한 분이 아니에요. 희생만으론 그런 사랑이 안 나오죠. 어머니에겐 큰 힘이 있었어요. 온몸을 다해서 삶의 희망을 보여주는 전범(典範)으로서의 어머니가 있는 거죠.”
-아버지의 정실부인이 따로 계셨으니, 선생님은 말하자면 첩의 자식….
“첩의 자식이죠.”
-그게 콤플렉스가 되진 않았나요?
“아니, 전혀.”
-전혀 없었다고요?
“없었어요.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자존심 강한 분이셨거든. 아버지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가 조선전업(한전의 전신) 사장일 때도 절대로 손을 벌린 법이 없어요. 1년에 딱 한번, 세배만 보냈지. 그건 우리가 할 도리니까.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도시락을 못 싸갔지만, 그게 부끄러운 적도 없었어요. 굶어 죽어도 엄마는 늘 당당하고 명랑했어요. 그게 자식들 자존감을 지켜준 것 같아.”
어머니를 캔버스에 담으면서, 버려진 빨래판과 폐품을 이어서 어머니의 부조를 만들면서, 윤석남은 어머니의 긍정적 낙관과 강인한 모성을 생각했다. 세상의 여리고 약한 것들을 보듬는 모성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애써 외면하고 부정해온 자기 안의 욕망과 화해했다.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걸 나누려는 몸짓은 사치가 아니다. 여성성은 나누고 베푸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성이라는 걸 그는 깨달았다. 그에겐 비싼 옷이나 명품 백이 없다. 신자는 아니지만 그는 지금도 생활비의 십분의 일은 뜻있는 일에 기부한다.
이후 그의 작품은 허난설헌과 이매창, 김만덕, 나혜석, 최승희, 고정희와 같은 역사 속 여성들과의 공감으로 표현되었고, 버려진 개들을 거둬 키우는 평범한 동시대 여성에 대한 헌사로 이어졌다. <1025: 사람과 사람 없는>(2008년 작)은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읽고 5년여에 걸쳐 1025마리의 개를 조각하고 드로잉해 만든 작품이다. 세상 모든 생명은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1025마리의 개를 새기면서 윤석남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작품을 할 때마다 그는 치유받고 고양되었다. 그 희열은 지난 40년간 그의 변화무쌍한 창작열을 뒷받침해온 원동력이다.
-저희 세대는 이전 세대 여성들보다 실권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아파트 재테크나 자녀 사교육도 대개 여자들이 좌지우지해 왔죠. 이 극성스런 여성 파워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건 여성성이 아니에요. 여자들이 자기 자식밖에 모르고 극성스러워지는 ‘막무가내 모성’을 보면 정말 나부터 이를 앙다물게 돼요. 우리 어머니 세대엔 그런 가족이기주의가 아니었어요.”
‘밥 한 사발 노나 먹는’ 모성의 힘으로
-그래요?
“그때는 너나없이 가난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기한테 좀 이익이 덜 되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타인을 보듬고 가는 정서가 있었어요. 내 새끼만 잘되면 돼, 이런 게 아니었다고요. 마을 전체가 다 가족이었지. 우리 엄마만 해도 그래요. 70년대만 해도 시골서 돗자리 장수가 올라오잖아요. 광주리에 가득히 이고. 우리랑 아무 연고도 없는 할머니였는데 어머니는 그분 오시면 매번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했어요. 방 두개에 일곱 식구가 사는데 그 할머니까지, 그냥 껴서 자는 거지. 엄마 사랑이라는 건 자식한테만 가는 게 아니에요.”
윤석남이 일기처럼 짧은 글을 써넣은 드로잉 중에는 어린애를 꼭 품고 앉은 할머니가 있다. 번잡한 땅에서 살며시 떨어져서 하늘로 이어진 그네에 매달린 채, 할머니의 기원이 또박또박 들풀처럼 땅에 뿌려진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천금 같은 내 강아지 이 땅에 자라나서 큰사람 되거들랑 약한 사람 도와주고 부자가 되거들랑 밥 한 사발 노나 먹게 도와주옵소서. -2001.10.13. 윤원석남. 미국 군인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들어가 폭탄을 떨어뜨린다는 뉴스를 듣는 게 아파서 티브이를 꺼놓는다.”
윤석남을 숨조이던 ‘핑크 소파’가 김만덕의 눈물을 닮은 ‘핑크빛 심장’으로 거듭 나는 데 40년이 걸렸다. 윤석남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대, 아직도 그 소파에 매달려 계신가요?”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유치원생 딸을 키우며 살다가
마흔살 되던 해 어느날 전날 받은
월급봉투 몽땅 털어 화구를 사와
“나 그림 해야겠다” 선언을 하다 미술 입문하고 ‘어머니’에 천착
‘월하의 맹서’ 감독 윤백남 만나
후실로 들어와 과부가 된 뒤
여섯 남매 키워낸 원정숙씨는
온몸으로 삶의 희망 보여준 전범
윤석남의 작품 <핑크룸4>(1998). 가정에 붙박인 무기력한 여성과 소파를 찢고 나오는 위험한 욕망을 형상화했다. 윤석남&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화가 윤석남은 반바지에 샌들, 옥색 스카프에 헝겊가방을 멘 멋쟁이 할머니였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주의는 비장하고 저돌적이기보다는 따뜻하고 솔직하며 관대하다. 강재훈 선임기자
지난 9일 이진순씨(사진 왼쪽)에게 작품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역사 속 여성들과의 공감 표현
유기견 키우는 동시대 여성에
헌사 보낸 1025마리 개 조각작품
만들며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윤석남을 숨조이던 ‘핑크 소파’가
김만덕 눈물 닮은 ‘핑크빛 심장’으로
거듭나는 데 40년이 걸렸다.
윤석남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대, 아직도 그 소파에 매달리는가” 첩의 자식? 그건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서 윤석남은 어떤 답을 얻었을까? 그가 미술에 입문하고 제일 먼저 천착한 주제는 그의 어머니 원정숙(1915~2010)이었다. 열아홉살 어린 나이에 하숙집 딸로 스물일곱살 차이가 나는 윤백남을 만나 그의 후실이 되고, 서른아홉에 과부가 되어 여섯 남매를 억척스레 키워낸 어머니. 아흔다섯살에 작고하실 때까지 진심으로 세상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셨던 여인. 공장 일에 밭일까지 하면서도 ‘센베이’ 한봉지 사들고 밤늦게 돌아와 자는 애들을 깨워 카드놀이를 하자셨던 낙천적인 엄마.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학력에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즐겨 읽으시던 깨어 있는 여성이었다.
윤석남을 만든 시간들
이진순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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