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강남 돈봉투 1억원’으로 ‘친절한 기자들’에 얼굴을 내민 지 2주 만에 또다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사회부 24시팀에서 지난주 토요판팀으로 발령받은 오승훈이라고 합니다. 마니아층이 두꺼운 <한겨레> 토요판 지면에 누가 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뛰겠습니다.
오늘은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하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 중이던 지난 15일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지역 배포판에 박 대통령을 겨냥한 전면 광고가 하나 실렸습니다. 한국군으로부터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하는 베트남 여성 4명의 사진과 함께 박 대통령이 거수경례하는 사진이 실린 광고에는 “박 대통령, 우리는 강간당했다. 이제 사과를 받아야 할 때다”라는 주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목소리’(Voices of Vietnam)라는 미국의 베트남 인권단체가 게재한 광고였습니다.
같은 날 이 단체는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기자회견 동영상을 보면 베트남 현지에 있는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이 화상전화로 연결돼 증언에 나섰습니다. 자신을 한국군에게 성폭행당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한 쩐반티(45)는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이후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에 유감을 느낀다. 강간당한 베트남 여성들도 좋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눈 밝은 독자들은 느끼셨을 겁니다. 쩐반티씨의 이야기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아베 총리로, 베트남 여성을 위안부 피해 여성으로 바꾸어 읽으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라는 것을 말입니다. 청산되지 못한 일본군의 전쟁범죄가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해 고스란히 반복된 까닭입니다.
<한겨레21>은 1999년 9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최초 보도했습니다. 그 뒤 고엽제전우회로부터 회사 난입이라는 봉변을 당한 일은 유명합니다. 지난 4월 <한겨레> 토요판은 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커버스토리로 최초 보도했습니다(‘할머니의 어떤 기억’ 2015년 4월25일치 1·3·4면). 당사자들이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고 당시 정황과 실상을 밝히기는 한국 언론사상 처음이었습니다. 빈딘성 인민위원회가 공식 확인한 전체 성폭력 피해자 26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61살에서 86살까지 8명의 할머니들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단에게 어렵사리 털어놓은 증언은 차라리 거짓이길 바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한겨레> 보도 이후 평생 고통으로 신음하던 피해자들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기자회견은 그 일환으로 보입니다. 한국 사회에 머물던 사과와 보상 요구가 이제 국제사회로 퍼져나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관련 사실 인정은커녕 진상규명조차 하지 않는 한국 정부는 이제 미국 사회를 상대로 논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박 대통령의 방미 일정에 맞춰 진행된 미국 베트남인들의 ‘행동’에 의구심을 나타내는 보도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남의 목소리를 지원하는 놈 콜먼 전 상원의원이 일본 정부가 고용한 로비회사에 소속된 로비스트인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번 행동의 배후에 일본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성 보도들이 나온 것입니다.
최근에 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단체는 지난 19일에는 누리집(vietnamvoices.org)을 통해 2만9000명의 항의 서명서를 모아 한국 대사에게 전달했다고 알린 바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 대한 사과 요구와는 별개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베트남전 기간 중 한국군의 조직적인 강간’에 대한 유엔의 조사를 촉구하는 청원 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정부는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지 않지만 과거사에 대해 언급 자체를 꺼려온 그동안의 입장에 비춰 재미 베트남인들의 운동을 묵인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베트남의 목소리가 일본의 지원을 받고 움직이는 단체인지 확인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군이 베트남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사과 요구는 한국에 대한 그들의 사과 요구로 메아리칩니다. 베트남의 목소리의 진짜 ‘정체’와는 별개로 한국 사회가 베트남 사람들의 사과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잘못을 인정할 때,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오승훈 토요판팀 기자 vino@hani.co.kr
오승훈 토요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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