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suji@hani.co.kr 2016년 5월20일 저녁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강남역 인근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노트북을 열어 마이크를 잡은 이의 말을 빠르게 받아 쳤습니다. 마감이 임박했거든요. 마음은 급한데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습니다. 차마 예상도 못했던 내용으로 흐느끼며 고백한 한 대학생 때문이었습니다. 꼬박 일년이 지난 지금, 그때 취재한 메모를 들춰봤습니다. 최대한 말투를 살려 옮깁니다. “저는 대학생입니다. 얼마 전 어버이날에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서웠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릴까봐, 나를 때릴까봐 무서웠습니다. 아빠는 또 술을 마시고 ‘네 표정이 이게 뭐냐, 왜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느냐’며 저와 동생,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어버이날 아빠를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일을 겪기 전까지 이걸 여성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나쁜 놈이라서, 엄마가 힘이 약해서 그렇다’고,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건 남성인 아버지가 권위를 가지고 집에서 여자들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표정이 안 좋다고,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대학생이 가리킨 ‘이번 일’은 지난해 5월17일 새벽 20대 여성이 강남의 상가 공용화장실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입니다. 희생자를 추모하러 온 이들은 강남역 주변에 간이로 마련된 ‘자유발언대’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고백을 쏟아냈습니다. 아버지의 가정폭력, 직장에서 받은 성차별, 친족한테 당한 성폭력…. 이들한테 강남역 사건은 ‘내가’ 약해서, 잘못을 해서, 맞을 짓을 해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난 게 아니었다는 점을 알려줬습니다. 그저 이 사회에 중력처럼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멸시·차별·비하·폭력 등을 아우르는 ‘여성 혐오’가 원인이라는 점을 도끼로 얼음장을 깨듯 일깨워준 것이었지요. 저도 제 또래 여성들과 비슷하게 가정과 학교에서 크게 차별받지 않았습니다. 그것과 무관하게 밤길엔 뒷사람을 먼저 보내고, 택시를 타기 전에 차 번호를 가까운 이에게 메시지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무서웠거든요. 하지만 ‘성인 여성’답게 그런 생활의 긴장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네가 나야.’ 강남역 10번 출구 덮개 위 봉분처럼 덮인 수많은 포스트잇 가운데 이 네 글자가 콕 박혔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실감’했습니다. 저만 조심하고 살핀다고 괜찮아지지 않는다는 걸요. 1년이 흘렀습니다. 강남역 사건 1주기인 지난 17일, <한겨레>에선 이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를 선언하며 행동한 20대 ‘영영페미’들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뉴페미’라고 불리기도 하고 이들 스스로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며 ‘헬페미’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1년 전 느낀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에서 멈춰 있지 않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차별과 혐오에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이들입니다. 페미니스트라는 낙인과 편견이 두려웠지만 ‘영영페미’들은 강남역에서 행동할 ‘용기’를 얻었다고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는 이가현(25)씨는 “내가 느끼는 이 ‘피해의식’이 세상을 바꾸는 소중한 동력이 됐다”고 ‘피해의식’이라는 부정적 낱말을 재정의했습니다. 이들은 지난 촛불 정국에선 광장 한켠에 ‘페미존’을 만들고 혐오 발언을 제지하고 적극적으로 발언자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를 ‘미스 박’이나 ‘여편네’라고 부르는 것부터요. 이렇게 ‘사소한 것’과 ‘여성 안전’이 무슨 관계냐고요? 범죄심리학을 전공한 김민정 전 형사정책연구원 위촉연구원은 “조현병 환자는 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범인이 남성 6명을 지나치고 여성을 살해했을 때 거기엔 ‘여성 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이 개입돼 있다”고 했습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비하와 범죄가 ‘자연스러운’ 이 오래된 적폐를 청산하려니 ‘오버’할 수밖에요.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지점에서부터 이들이 ‘프로불편러’로 나선 이유입니다. 지난 17일 밤 1000명 가까이 강남역에 모여 다시 포스트잇을 붙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어쩌다 살아남은 우리, 꼭 세상을 바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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