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정은주 경제에디터석 정책금융팀 기자 ejung@hani.co.kr
“아이랑 같이 있으면 통화가 어려운데 아침 일찍 남편 출근하기 전(오전 8시쯤)이나 아이가 잠든 밤 늦게(11시 이후) 가능해요. ㅜㅜ 괜찮을까요?”
전업주부든 ‘워킹맘’이든 ‘82년생 김지영들’은 하나같이 30분 정도의 시간도 내기 힘들어했습니다. 아이가 잠든 시간이나, 일터에서 집으로 향하는 이동시간에만 통화가 가능한 그들의 일정에 맞춰 저는 ‘김지영’ 6명을 인터뷰했고, 그들의 “전쟁 같은 하루”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들의 좌절’이라는 기사(11월15일치 1면)로 썼습니다. 안녕하세요, 경제에디터석 정책금융팀에서 일하는 정은주입니다.
베스트셀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30대 여성이 경험하는 일상적 차별과 구조적 불평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읽으며 딱 절반만 공감했습니다. 둘째딸로 태어나 네살 터울인 남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던 할머니와 살았고, 나이 지긋한 남성 취재원들의 시답지 않은 농담을 억지웃음으로 받아가며 기자생활을 했기에 가정과 일터에서 경험하는 차별은 깊이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13년 전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아 육아 책임자로서 맞닥뜨리는 구조적 불평등은 알지 못했습니다.
정경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이 펴낸 ‘82년생 여성의 노동시장 실태분석’ 보고서를 읽으며, 결혼한 82년생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51%에 그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이유입니다. 2명 중 1명은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했다는 건데, 10명 중 9명이 일하는 같은 나이의 남성(93.4%)이나 미혼 여성(84.8%)과는 확연히 다른 삶입니다. 성별에 따른 교육기회의 차별이 거의 사라진 시대에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김지영처럼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해 아이를 낳은 82년생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밤늦은 시간, 좋아하던 직장을 포기하던 순간을 소곤소곤 풀어내던 ‘김지영들’은 잠시 침묵하며 젖은 숨소리를 내뱉었습니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점심도 걸러가며 일하고 칼퇴근해서 집으로 달려가 아이를 돌보는 숨막히는 일상을 털어놓으며 ‘김지영들’은 목소리가 날카로워졌습니다.
“남편에게 결혼한 걸 후회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한 번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데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선택한 걸 엄청 후회하거든요.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하니까요. 사회적 인식은 바뀌지 않았는데 여자만 쓸데없이 교육을 많이 받아서 고통을 겪는구나 싶어요.”(박수연씨·35·이하 모두 가명)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가 그래요.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을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뿌리박혀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남편은 자기가 직장동료나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가정적인 남자라고 주장해요. 나한테는 턱없이 부족한데 말이죠.”(최순정씨·35)
82년생 김지영들은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 평화가 깃드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또다른 엄마가 희생할 때입니다. 엄마들이 그렇듯, 할머니들이 자녀를 위해 육아에 뛰어드는 겁니다.
“딸들한테 (전업주부였던)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해요. 너희들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성취감 맛보면서 살라고요. 나중에 (아이들 다 크고 나서는) 하고 싶어도 (사회가) 받아주질 않잖아요. 그래서 가장 힘든 때 내가 도와주면 (딸이) 베테랑이 되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잖아요.”(7살과 4살 손자를 돌보는 노이숙씨·59)
“아이가 열이 많아서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일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엄마들을 보면 가슴이 철렁해요. 직장 그만두겠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죠. 딸들한테 내가 아이들 다 키워줄 테니까 일 놓지 말라고 해요. 엄마가 고비를 넘길 때 든든한 동반자가 돼주겠다고요.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무너지지 않으려면 내가 힘이 있어야 하더라고요.”(손자 키우려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딴 허준희씨·59)
엄마들의 눈물겨운 모성애에 가슴이 저릿해졌습니다. 저도 오늘 엄마한테 안부전화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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