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① 동생 잃은 언니의 깨달음
① 동생 잃은 언니의 깨달음
‘스토킹’ 하면 낯선 사람이 따라오는 모습이 연상되나요? 스토킹 가해자의 대부분은 (전) 남자친구, (전) 남편입니다.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스토킹이 발생하는 셈입니다. 한때 친밀한 관계였던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때론 다정한 얼굴을 보이기도 하죠. 가해자는 위협만 하는 게 아니라 애원하고 호소합니다. 피해자의 동정심, 죄책감을 노린 계산적인 행동입니다. 제풀에 지쳐 그만두겠지 싶지만 피해자를 통제하고자 하는 가해자의 욕구는 결코 스스로 멈추지 않습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와 만난 스토킹 살인 유가족과 지인들은 한목소리로 ‘그때는 몰랐다’고 자책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낸 오답은 사실 우리 모두의 무지와 편견일 겁니다. ‘또 다른 헛된 죽음을 막고 싶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스토킹 살인은 편견을 먹고 자란다’ 기획 기사는 스토킹이 어떻게 잔혹한 살해로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세 건의 범죄 스토리를 통해 유가족과 지인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수년간 일방적 구애를 하던 남성에게 동생을 잃은 언니의 이야기입니다. 언니는 왜 “사랑한다는데 설마 죽일 줄은 몰랐다”고 말했을까요.
“옆에만 있게 해달라” 매달리고
‘죽을병 걸렸다’ 거짓말로 붙잡아
동생은 “내가 이기적” 자책까지
“마지막으로 한번만” 말에 나간 자리
시시티브이 속 동생은 웃고 있었다
이수정 교수 “약자 코스프레로 동정심 이용”
평소 협박이나 폭행 없었기에
경찰 신고는 생각도, 엄두도 못냈다
“좋다고 쫓아다닌 그 남자가
동생 죽일 줄이야…그건 스토킹이었다”
“보는 눈이 없다” 충고 가장한 꾸중
‘꽃뱀’ 취급 무책임한 악플에 더 고통
“왜 여자가 일일이 조심하고 도망쳐야 하나” 11월19일, 동생은 도대체 왜 연락을 끊었다던 최현승을 만나러 갔을까. 윤민정은 “동생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분명히 최현승은 또 울면서 한번만 더 만나달라고 했겠죠. 몇주 뒤면 미국으로 떠나는 동생은 마지막으로 그 말을 하려고 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에 최씨의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의 얼굴이 잡혔다. 웃고 있었다. 동생은 무방비였다. ■ ‘죽을병에 걸렸다’는 거짓말 경찰은 윤민정에게 죽은 최현승이 서른일곱살이라고 말했다. 동생은 최현승을 ‘동갑’으로 알고 있었다. 집은 잘살지만 부모가 이혼해서 용돈을 받아 쓴다는 말도, 누나가 있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충격적인 거짓은 또 있었다.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동생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에 발이 묶여 죄책감까지 느끼며 마지막까지 최현승을 내치지 못했다. 윤민정에게 이 거짓말은 너무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최현승은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최현승이 ‘약자 코스프레’를 하며 피해자의 동정심을 이용했다”며 “최현승은 자존감이 바닥이면서 관계에 대한 병적 집착이 있던 사람으로 보인다. 죽음만이 피해자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취해 본인도 같이 죽는 드라마틱한 결말을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 “칼 맞을 수도 있어” 말로만 그랬지 설마… 윤민정은 지난해 6월 동생 민희와의 카카오톡 대화 일부를 <한겨레>에 공개했다. 이 대화 내용은 가해자 최현승의 자살로 경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드문 증거다. 윤민정의 경고는 말뿐이었다. 그는 “그냥 말로만 ‘그런 애들이 칼 꽂는다’고 이야길 한 거죠. 내 동생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인데 설마 죽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최현승이 평소 협박을 하거나 때린 적이 없다는 점도 윤민정과 동생 민희가 경계심을 낮춘 중요한 이유가 됐다. 경찰 신고 역시 같은 이유로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다면….” 윤민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은 “최현승처럼 신체적 위협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피해자의 거부 의사에 반해 계속 쫓아다니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행위 자체가 스토킹이자 폭력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최현승의 행동을 ‘꾸준한 구애’ 정도로 보고 그 이상의 위험 신호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윤민정과 동생 민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 2월 정부는 스토킹처벌법(가칭)을 제정해 현행 범칙금 수준에서 형사처벌로 스토킹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조 팀장은 “법이 제정된다 해도 스토킹 인정 여부, 피해자 공포에 대한 측정과 입증은 결국 다시 사회적 인식 수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윤민정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한다는데 죽일 리 없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저는 물론 누구도 동생을 구하지 못할 거예요.” ■ 다시 생각하는 사랑의 이름 윤민정이 동생의 주검을 보기 전, 동생의 사망 기사가 먼저 나왔다. ‘정말 내 동생 이야기일까.’ 윤민정은 기사를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그런데 동생이 끝이 아니었다. “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매일 그런 기사들이 보였어요. 다음날이면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그 다음날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죽이더라고요.” 그들도 최현승과 똑같았다. 최현승이 마지막까지 동생을 “사랑한다”고 했던 것처럼 그들도 경찰 수사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나는 내가 죽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윤민정은 동생의 죽음으로 미뤄진 졸업 전시회를 다시 꾸몄다. 제목은 ‘사랑의 이름’. 기사 검색창에 ‘남자친구 살해’라고 쓰자 최근 1~2년 사이에만 수십건의 기사가 나왔다. 윤민정은 편지지를 펼쳐 살인 사건들을 직접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를 죽이고 애완견까지 세탁기에 넣어 죽인 남성에게 법원이 중형을 선고했다.’ 하트 표가 그려진 편지 겉봉투에는 이렇게 썼다.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아 참! 그게 바로 너야!’ 전시회가 열린 12월27일은 동생이 죽은 지 한달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동생이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출국하려던 날이기도 했다. 윤민정은 전시회에 가지 않았다. 갈 수 없었다. ■ 스토킹 피해자더러 ‘꽃뱀’이라니 ‘원룸서 15살 나이차 남녀 숨진 채 발견,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헤어지자니까 죽인 거 아냐? 동반자살인가? 커지는 의심’ 윤민정의 동생 민희의 죽음을 다룬 기사들의 제목이다.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은 그 자체로 윤민정과 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았다. 댓글도 상처가 됐다. 윤민정은 “동생을 두고 ‘꽃뱀’이라고 몰아가거나 ‘남자가 다 해주고 나니 튀려고 해서 그렇지’ 같은 댓글이 달렸더라고요. 악플로 치부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너무 많았어요”라고 말했다. 그 뒤를 이은 댓글은 충고를 가장한 꾸중이었다. ‘왜 그런 쓰레기를 만났어, 여자가 보는 눈이 없네’ 같은 이야기였다. 윤민정은 말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해요. 남자가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면 헤어지라고. 그런데 최현승을 봐서 알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요. 그리고 말이죠, 왜 여자가 도망가고 일일이 조심해야 하는 건가요?” ■ 살렸다 죽이고, 살렸다 죽이고 싶지만… 윤민정은 최현승이 자살한 게 “차라리 낫다”고 했다. 재판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은 줄 알았다. “마음 같아선 살렸다 죽이고, 또 살렸다 죽이고 싶죠. 그런데 재판받고 다시 살아서 사회에 나올 걸 생각하면 최현승이 자살한 게 나은 것 같아요. 형량이 너무 적더라고요. 전 여자친구 죽여도 10년, 어떤 사람은 아예 집행유예로 나오던걸요. 또 최현승이 우리 집을 알았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요.” 이제 동생도, 최현승도 없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남았다. 아직 해지하지 않은 동생 휴대전화에 기대를 걸고 복구업체에 여러번 의뢰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기기 특성 탓이라고 했다. 가끔 무신경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아버지가 많이 캐고 다니셨어요. 민희 친구들한테 일일이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하셨죠. 그런데 친구들도 딱 저만큼 알고 있었어요. 지금도 그러고 계세요.” 어쩌면 아버지는 진실을 좇고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아버지는 지금 그보다 훨씬 소중한, 딸의 흔적을 찾고 있다. 그리고 하루 두번, 윤민정에게 전화를 건다. 남은 딸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 이 기사는 윤민정(가명)씨와의 인터뷰, 윤씨가 제공한 동생과의 카카오톡 메시지 대화 내역, 그리고 지난해 12월27일 열린 ‘사랑의 이름’ 전시회 소개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문화국 인권팀장,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유진 이재호 기자 yjlee@hani.co.kr 일러스트 son of you 디자이너 wjsalsry1@gmail.com
스토커는 모르는 사람? 대부분 ‘아는 사람’ 스토킹에 대한 가장 넓고도 확고한 편견은 ‘가해자는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스토커는 대부분 피해자와 아는 사이다. 2016년 한국여성의전화 상담소 초기 상담 2107건 가운데 스토킹 상담은 모두 252건(전체 12.1%)이었는데, 피해자-가해자 관계를 살펴보니 98.4%가 ‘아는 사람’이었다. 이 ‘아는 사람’의 78.9%(194건)는 전·현 남자친구였다. 2017년 한국여성의전화 데이트폭력 상담 407건 가운데 스토킹을 함께 경험한 사례는 31%(126건)에 달했다. 가정폭력과 스토킹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경우도 45건이었다. 조재연 인권팀장은 “가정폭력·데이트폭력의 연장으로 관계 중단 과정에서 주요하게 나타나는 행위가 스토킹”이라고 정의했다. 가해자와 한때나마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은 스토킹을 비롯한 여성폭력 피해가 초기에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는 공통적인 이유다. 조 팀장은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상담소로 전화할 때는 대부분 폭언·통제 등 정서적 폭력이 신체적 폭력까지 진행된 시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피해를 희석시키는 탓”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소극적 대응도 피해가 은폐·축소되는 악순환을 부른다. 2016년 한국여성의전화 데이트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경찰 신고율은 4.8%에 불과하다. 기껏 신고했더니 경찰이 사건을 사소하게 취급하거나 합의를 종용했다는 답변이 많았다. 거꾸로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신고나 고소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증거가 없어서’ ‘경찰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등의 답변이 나왔다. 윤민정(가명)에게 동생을 스토킹하던 최현승(가명)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더니 “폭행당한 사람을 신고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던데 뭐라고 하면서 신고를 했겠냐”는 답이 돌아왔다. 정부가 최근 스토킹을 경범죄에 부과하는 범칙금 수준이 아닌 벌금·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대응 방안을 내놨지만, 단순히 형량을 높이기보다 범죄의 특성을 고려한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데이트 상대, 배우자, 동거인, 친족 등 인적 신뢰관계자가 스토킹을 하면 가중처벌하도록 한 ‘스토킹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2016년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은 정부 방침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방안이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 디지털 인터랙티브 페이지로 이 기사를 보시려면: https://goo.gl/F7pZ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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