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현대무용가인 류아무개씨가 제자를 상습 성추행한 혐의로 검찰에 기소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1주일만에 문화예술계 종사자 770여명이 연대 성명에 참여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유명 현대무용가이자 ‘ㄷ무용단’ 대표인 류아무개씨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지난달 14일 기소된 사실이 지난 1일 알려지면서 무용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연대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류씨는 2015년 4∼5월 개인 연습실에서 제자 ㄱ씨를 수차례 성추행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이 발표한 연대 성명에는 1주일만인 22일 문화예술계 종사자 770여명(개인 693명, 단체 78팀)이 실명으로 참여했다. 단일 성폭력 사건에 대해 무용계 연대 성명이 발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무용계는 2016년 문단을 시작으로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했던 ‘#○○계_내_성폭력’ 고발 운동 때도 유독 조용했다. 무용 칼럼니스트 윤단우씨는 “무용계는 마치 ‘분리 불안’처럼 ‘스승’과 떨어져 독립하는 걸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모든 예술계가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무용계는 특히 몸을 (쓰다 보니) 더욱 통제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선생님이 나쁘다’가 아니라 ‘그 분 덕에 상을 받았는데 이 정도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고 윤씨는 짚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어지는 사제관계 안에서 ‘가스라이팅’(가해·피해 상황을 조작해 상대방이 판단력을 잃게 하는 정서적 학대행위)에 익숙해져 ‘그루밍(길들이기) 성범죄’의 양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윤씨는 “스승의 인정과 사랑에 가치를 두다 보니 ‘선생님이 나를 좋아해서 그랬다’고 하면 성폭력이라는 걸 자각하는 것도 어렵다”며 “이후 시간이 지나서 사건화가 되면 (가해자들은) 누군가 자신을 음해하려는 행위로 치부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제자 ㄱ씨는 19일 <한겨레>와 만나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털어놓을 때마다 주변에서 “너를 너무 예뻐하셔서 그랬을 것”이란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 일을 털어놓을 때마다 ‘제가 잘못한 건가?’ 싶을 정도로 주위에서 등을 돌리더라고요.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예요. 아무리 도와달라고 사람들한테 외쳐도 공기 중으로 사라졌을 뿐이죠.”
소수가 각종 협회 이사직과 교수, 경연 심사위원직 등을 독식하며 ‘카르텔’처럼 이어지는 구조 역시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어렵게 한다. 사건 발생 당시 ㄱ씨가 다니던 학교의 학부장은 류씨의 부인인 이아무개 교수였다. ㄱ씨는 이 교수에게도 피해사실을 털어놨지만 “‘너가 착각한 것 아니냐. 지난 일은 잊자’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또 “서울 경연에서 마주칠까봐 일부러 부산에서 열리는 경연에 나갔지만 거기서도 심사위원은 류씨였다”고 말했다.
ㄱ씨는 결국 지난해 학교를 옮겼지만, 해당 학교에 류씨가 겸임 교수로 부임했다. 전공 필수 과목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의 수업을 듣지 않으면 졸업이 불가능했다. “한 학기가 끝날 때쯤엔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는 ㄱ씨는 “지금 신고해도 늦지 않았다”는 의사의 조언을 거듭 듣고서야 류씨를 고소할 결심이 섰다. 윤씨는 “20여년 전에도 유명 안무가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된 적 있지만 당시 가해자가 실형을 살고 나왔음에도 무용계에 버젓이 돌아와 계속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며 “가해자의 공연에 대해 관람부터 평론, 취재 보도까지 보이콧하는 움직임부터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용이 너무 좋았고 선생님을 존경했다”는 ㄱ씨는 이제 “썩은 물인걸 알면서 계속 그 안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뿌리 깊은 문제가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도 용기를 낸 건 ‘미투’ 운동 덕이다. ㄱ씨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이 없었으면 (고소·고발은) 상상도 못했을 것 같다”고 했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은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성폭력 관련 교육과 매뉴얼 마련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발언하겠다”고 밝혔다. 오는 30일까지 연대서명을 받은 뒤 이를 재판부에 제출하고 법정 방청을 함께할 예정이다. <한겨레>는 입장을 듣고자 류씨와 이 교수에게 수차례 연락했지만 둘 모두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1심은 다음달 17일 열린다.
박다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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