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한국사회의 여전한 금기 ‘오빠 성폭력’
올케·조카 걱정에 익명 공개
한국사회의 여전한 금기 ‘오빠 성폭력’
올케·조카 걱정에 익명 공개
‘오빠 성폭력’ 기사에 실린 그림들은 실제 두 오빠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경험을 쓰고 그린 노유다 작가의 책 〈코끼리 가면〉의 삽화다. <코끼리 가면> ⓒ 노유다, 움직씨
시작은 Y(16)였습니다. ‘청소년 자해’(제1237~ 1239호)를 취재하면서 만난 Y가 최근 ‘오빠 성폭력’ 피해자라고 털어놨습니다. 부모님이 믿어주지 않는다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기에,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Y가 머물 쉼터를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놀랍게도 쉼터에는 Y 같은 아이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기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P와 K를 만났습니다. 곁에서 아이들을 엄마처럼 챙기던 A선생님의 눈물보가 터졌습니다. 선생님도 40여 년 전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빠 성폭력 피해자 4명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훨씬 더 많은 피해자 얘기도 전해 들었습니다.
1981년 미국 정신과 의사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초판이 출간되면서 미국 사회에서는 유사 이래 광범위한 ‘사회적 공모’ 아래 숨기거나 외면해왔던 ‘근친 성학대’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1992년 의붓아버지 김영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딸이 남자친구와 함께 김영오를 살해하면서 친족 성폭력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친족 성폭력 중에서도 오빠 성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금기’로 남아 있습니다. 성교육 강사들조차 청중이 워낙 불편해해서 차마 건드리지 못하는 주제라고 했습니다. 자녀 성교육에 관심이 많은 부모조차 자기 아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의심하는 것 같다며 언급조차 꺼린다고 합니다. 요즘엔 아빠 성폭력 사건에서 마지막 순간에 남편 대신 딸을 끌어안는 엄마가 꽤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이 가해자인 오빠 성폭력 사건에서, 엄마들은 백이면 아흔아홉 딸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본능적인 ‘유기 공포’ 속에 피해자인 딸들은 침묵합니다. 전문가들이 오빠 성폭력을 ‘#미투 시대 금기’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금기로 치부되기 때문에 피해자 보호도 못하고 예방 교육도 할 수 없는 현실… 40년 전 A선생님과 40년 뒤 Y·P·K가 겪은 일이 똑같다는 <한겨레21> 기사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빠 성폭력 가정의 한 부모가 상담받으러 와서 실제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옛날엔 집집마다 아빠, 오빠, 작은아버지, 큰아버지한테 당하는 애가 얼마나 많았냐. 그래도 다 잘 지나갔는데 괜히 국가가 이런 거(상담) 만들어서 문제를 만든다.” 한 피해자 아이의 말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상처 난 손가락은 더 먼저 돌봐줘야 하는 거잖아요. 아들이든 딸이든 같은 자식인데, 오빠 성폭력 사건에서는 장남이라고 아들을 감싸고 집안 망신이라고 딸을 숨겨요. 상처 입은 딸은 ‘내 편이 없다’거나 ‘쓸모없는 존재’라는 서운함, 절망감, 분노 때문에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부모의 말도 아이의 말도 절망적일 정도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거점) 부소장 겸 아주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말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습니다. 장 부소장은 2010년부터 해바라기센터에서 일했습니다. 10여 년 전 ‘사촌오빠 성폭력’ 사건이 들어오면, 가해자가 친가냐 외가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랐다고 합니다. 가해자가 외가일 때는 피해자 부모 양쪽이 딸을 보호하는데, 가해자가 친가 쪽일 때는 피해자 아버지가 애매한 태도를 보여 피해자 보호가 잘 안 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가해자가 친가든 외가든 상관없이 ‘사촌오빠 성폭력’은 대부분 피해자 중심주의로 해결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감췄던 금기를 꺼내 이야기를 시작하면, 10년 뒤 딸들이 오빠한테 당한 1차 피해보다 부모한테 더 큰 2차 피해를 당하는 일은 사라지지 않을까요?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한겨레21>은 ‘오빠 성폭력’ 취재 과정에서 형에게 성폭력을 당한 남동생 역시 생각보다 많다는 전문가들의 현장 경험을 전해 들었지만, 피해 당사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형 성폭력’을 공론화해주실 피해자와 관계자의 제보를 메일로(ggum@hani.co.kr) 받습니다.
*‘오빠 성폭력’ 피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1인칭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40여 년 전 ‘오빠 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게 완치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저는 잘 살아남았습니다. 가해자인 오빠는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와 오빠를 처벌할 수 없고 사실 저는 오빠를 용서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겪은 일을 나누려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저는 혼자 고군분투하며 괜찮아지느라 너무 오랜 세월을 허비했습니다. 남이 낸 길을 따라가려면 앞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사람을 못 믿었습니다. 저 혼자 길을 내면서 나아가느라 수풀을 헤치고 날카로운 풀에 베이며 돌아돌아 혼자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저와 같은 고통을 겪는 아이들은 저보다 ‘경제적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를 도와줄 사람이 있으니, 나처럼 너무 먼 길을 돌아가지 말고 곧은길로 편히 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너를 지켜주지 못하더라도, 너를 도와줄, 나 같은 어른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이름과 얼굴을 모두 공개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까요. <한겨레21>에 덜컥 “#미투 하겠다”고 말해놓고는 충격받을 남편과 아이들 생각이 났습니다. 올케와 조카도 가족인데, ‘내가 갑자기 #미투를 하면 얼마나 놀랄까, 이게 무슨 연좌제인가’도 싶었습니다. 결국 익명으로 하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게 핏줄입니다. 죽은 가해자의 가족까지 걱정해야 하는 저의 현실, 이 ‘더러운 현실’이 친족 성폭력, 특히 오빠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합니다. 큰오빠는 고2였습니다. 저는 엄마 아빠랑 안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엄마가 새벽예배를 가신 어느 날 방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오빠가 들어왔습니다. 제 입을 벌리고는 구강성교를 했습니다. 그다음은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 뒤로도 대여섯 번, 오빠가 방에 들어와 제 가슴을 만지거나 뒤에서 껴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유사강간에 그친 건 오빠가 삽입강간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40년 전, 비디오도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빠가 접할 수 있는 음란물이라곤 기껏해야 <플레이보이> 잡지였습니다. 요즘처럼 성관계 동영상이 판쳤다면, 당연히 삽입강간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 때 그 상황을 스스로 재해석하면서 제가 너무 혐오스러웠습니다. 자문자답하면서 오빠가 그렇게 하는 동안 가만히 있었던 저를 자책했습니다. 소리 지르고 화낼 수도 있었는데,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었던 제가 너무 추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도 즐긴 거 아니야? 그 상황에서 네가 잠자고 있었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어.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어?’ 그것이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인지 왜곡’이었다는 건 어른이 된 뒤 심리학을 배우면서 알았습니다.
왜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으실 겁니다. 요즘에야 엄마랑 딸이 친하니까 그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을 오늘날 생각으로 묻는 겁니다. 저는 1960년대 2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엄마는 남아선호 사상이 너무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특히 장남인 큰오빠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습니다. 아들한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서, 억눌린 걸 다 저한테 푸셨습니다. 아주 포악하게. 엄마한테 많이 맞았고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엄마한테 말하면 “이노무 기지배” 하면서 저를 더 때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풍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집은 부모 자식 간에도 어리광 피우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무서운 엄마한테 “오빠가 내 입을 벌리고 …했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왜 아버지한테 말하지 않았느냐고도 묻고 싶으실 겁니다. 그런 동시 들어보셨을 겁니다. “엄마는 밥 주고 강아지는 귀엽고 아버지는 왜 있지?” 하는 동시. 우리 아버지가 딱 그 동시에 나온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공무원으로 평생 일하셨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섯 시 땡’ 퇴근하면 집에 와서 밥 먹고 자기 방에 칩거하셨습니다. 책 보고 글 쓰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왜 있나’ 이런 생각을 하는 마당에, 아버지에게는 그런 말을 더더욱 할 수 없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점토로 만든 작품. 가운데 홀로 주먹을 불끈 쥔 피해자와 위에서 둘쨋줄 왼쪽에서 네 번째 눈을 크게 뜨고 놀란 가해자의 모습. 피해자는 다음에 가해자가 다시 방에 들어오면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지를 거라고 말했다.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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