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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임신중지’ 법정대리인 등 의무화, 병원 문턱만 높여

등록 2020-11-04 04:59수정 2020-11-04 13:54

청소년·장애여성 등엔 더 큰 장벽

미성년자엔 상담사실확인서 요구
낙태죄 처벌·예외적 허용 조항도
장애여성 재생산권 침해 우려
11월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100인 선언 주최로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통제 반대!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11월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100인 선언 주최로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통제 반대!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라일락(활동명)은 18살이던 2014년 임신중지를 선택했다. 임신 초기에 알았지만, 청소년에게 임신중지를 해주는 병원은 없었다. 수술을 안 한다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말만 들었다. 그는 결국 자신보다 두살 많은 친구에게 신분증을 빌려 수술을 받았다. 라일락은 “어느 곳에서든 빨리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고, 수술 전후에 의사로부터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며 “만약 (청소년임에도) 선택지가 있었다면 더 안전하게 시술을 하는 곳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낙태죄 관련 정부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청소년과 장애여성 등 사회적으로 취약한 여성일수록 의료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 입법안에 따르면, 만 16살 이상 미성년자는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하고, 만 16살 이하는 폭력·학대 등으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을 수 없을 경우 이를 입증할 공적 자료와 상담사실확인서를 내도록 해 상담 절차를 의무화했다. 또 심신미약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로 시술이 가능토록 했는데, 장애 특성에 따른 별도 조항이 없을뿐더러 당사자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절차가 아예 없다.

청소년들에게는 포괄적 성교육과 편견 없는 상담 시스템 마련 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청소년 건강행태조사 통계(2018년 기준)를 보면, 청소년의 성관계 시작 평균연령은 만 13.6살이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청소년의 성문화를 무조건 금기시하는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라일락은 “중학생 때 여학생들만 한곳에 모아두고 임신중지 관련 영상을 보여줬다. 다 자란 태아가 고통받는 모습이었는데 실제 임신중지와 다른 왜곡된 영상이란 건 뒤늦게 알았다”라고 말했다.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활동가는 “청소년이라며 의료기기인 콘돔 구입을 거부당하거나 응급실에서 긴급피임약 처방을 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며 “미성년자에게 상담을 의무화하거나 법정대리인 동의 조항을 요구하는 정부 개정안은 청소년의 성을 통제해야 한다는 관념을 강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산부인과의 문턱은 장애여성에게도 높다. 조미경 장애여성공감 공동대표는 “장애여성이 임신이나 임신중지를 할 때 장애 유형에 따른 특성을 고려해 관련 정보를 얻거나 수어 통역 등을 이용한 상담이 가능한 곳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짚었다. 실제로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장애친화 산부인과 서비스 표준 개발 연구보고서’를 보면, 전국 15개 장애친화 산부인과 가운데 시·청각 장애여성에게 의료 기록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춘 곳은 강진의료원, 장애유형별로 환자의 증상을 설명하는 지침이 있는 곳은 전남미즈아이병원 뿐이다.

이와 함께 정부가 임신중지의 예외적 허용 사유로 명시한 ‘사회·경제적 사유’가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을 침해하는 조항으로 오남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과거 산모나 태아의 장애 유무에 따라 출산 여부를 결정했던 ‘우생학적 사유’ 조항처럼 작동가능한 것이다. 나영정 장애여성공감 정책연구원은 “장애여성이 임신해서 병원에 가면 기혼이든 미혼이든 ‘지울거죠?’라고 우선 묻는다. 장애여성이 첫째를 출산한 직후 시부모가 당사자 동의 없이 불임수술을 시킨 경우도 있다”라며 “‘심신미약자’라며 법정대리인의 대리결정을 당연시해선 안 된다. 당사자의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관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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