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여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권력형 성범죄에 무딘 태도로 비판을 받아온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두고 “국민 전체가 성인지 감수성을 집단학습할 기회”라고 말해 또 다시 입길에 올랐다.
이 장관 발언은 5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나왔다.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거론하며 “공직사회 최고 지위에 있는 남성이 휘두른 성폭력 사건으로 838억원의 선거 비용이 나간다”며 의견을 물었다. 이 장관은 “국가에 굉장히 큰 새로운 예산이 소요되는 사건을 통해 역으로 국민 전체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집단학습을 할 기회가 된다”고 답했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건은 전형적
인 권력형 성범죄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수사 중인 사건에 관해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오 전 시장 사건의 경우 당사자가 이미 범죄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답변을 피한 것이다.
오거돈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저녁 이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대책위원회는 “피해자는 국민들에게 성인지 감수성을 학습시켜주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피해자 보호에 앞장서야 하는 여성가족부의 수장으로서 이러한 관점으로 기관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라고 비판했다. 오거돈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성명서에서 “여성가족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내 인생을 수단 취급할 수가 있나. 저 소리 듣고 오늘 또 무너졌다”라고 밝혔다.
이 장관은 지난 8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 나와서도 “수사 중인 사건의 죄명을 규정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여가부 장관이 아닌 수사기관장이 할 법한 답변 태도로 빈축을 샀다.
‘성인지 감수성 집단학습’을 거론한 이 장관은 정작 관련 정책 추진에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여가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나다움 어린이책’을 일부 학부모 단체의 반대로 회수했다.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혐오세력 주장에 제대로 된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정책 철회를 선언했다. (여성가족부)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계에서는 모든 사안에 성평등 시각과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해야 할 여가부 장관의 태도로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고위 공직자 성폭력 사건에 대해 ‘수사 중이어서 입장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하는 곳은 수사기관이다. 여가부가 이런 말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성평등 정책을 펼쳐야 하는 여가부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갉아먹는 발언”이라고 했다. 강혜란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도 “(권력형 성범죄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여가부 존립 이유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라고 했다.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나왔다. 정의당 정호진 수석대변인은 “권력형 성범죄가 초래한 보궐선거를 두고 여가부 장관이 사실상 두둔에 가까운 궤변을 하고 있다. 여가부 장관이 심기를 살펴야 하는 것은 집권 여당이 아니라 피해 여성과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대한민국 여성들”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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