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여성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1. 나의 낙태 체험기

등록 2020-11-26 15:26수정 2020-12-02 15:11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나의 낙태 체험기

모해

나는 방금 낙태를 했다. 장소는 가족들의 칫솔이 벽에 걸려있는 우리집 화장실이었다.

3년 전에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고 난 뒤, 국내 제약 회사들은 앞다퉈 임신 진단 키트와 묶음으로 알약 형태의 낙태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구호 단체에 신청해서 배송 올 때까지 마음졸이며 기다려야 했던 초기 임신 낙태 알약은 이제 닥터 페퍼보다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나 또한 집 근처 약국에서 구입한 임신 테스트기와 알약 세트를 사서 낙태를 했다. 임테기에 찍힌 두 줄이 선명하자 나는 미리 떠 다 놓은 물과 함께 알약을 삼켰다.

나는 변기에 앉은 채로 휴대폰으로 포탈 사이트에서 '낙태'를 검색한다. 검색 결과 상단에 뜨는 광고 사이트들을 무시하고, 스크롤을 내려 뉴스 섹션의 사회/문화면을 본다. 기사 정렬을 과거의 기사를 먼저 보이게 하자 온갖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이 눈을 끈다. 갑자기 증가한 낙태율 통계에 각 신문사들이 앞다퉈 현상을 분석하는 글들이 쏟아진다. 하지만 페이지가 뒤로 갈수록 기사 제목들이 조용해진다. 그중 하나를 눌러보니 낙태죄가 전면폐지 된 이후에 늘어난 낙태율은 일시적인 것이며, 피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남성들의 낮은 피임 협조가 실제 낙태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적혀있었다. 한숨과 함께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내가 임신을 하게 된 건 남자친구의 고의적인 피임 방해 때문이었다. 우리는 8년이라는 나름 긴 시간 동안 교제했고, 남자친구는 집안의 압력으로 결혼을 바라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내 월경이 늦어진다는 말을 듣고 임신이라면 결혼하자며 프러포즈를 했다. 나는 고민 끝에 거절하고 낙태하겠다고 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내가 임신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대답에 남자친구는 절대 낙태를 허락하지 않겠다며 차라리 헤어지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이틀 전에 들은 그 말에 아직 답장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결혼 적령기를 지난 내 나이에 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피임약을 먹고 나자 피곤함이 몰려왔다. 낙태약의 효과와는 상관없었다. 낙태라는 결정을 하기까지 했던 생각들이 머릿속에 무겁게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낙태죄가 전면 폐지된 지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자들은 임신을 빌미로 관계의 주도권을 쥐락펴락했다. 임신은 여자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남자도 함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성을 임신시킬 수 있는 생식능력을 함께 나누는 의무 대신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계의 불평등함에 나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조차 성권력에 따라 좌우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머리를 옆에 있는 세면대에 기댄 채 여전히 변기에 앉아있는데 휴대폰 알림이 왔다. 확인해보니 낙태 경험이 있었던 친한 여성 친구들로부터 메세지가 도착했다. 친구들은 내 낙태 결정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보내주었다. 짧은 응원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에는 아주 길게, 자신의 사정까지 적어서 격려의 말을 보내준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위로에 아주 조금, 눈물을 흘렸다. 그러는 동시에 남자친구는 겪지 않을 낙태에 대한 부담감을 나 홀로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함과 분노를 느꼈다.

나는 메신저를 켜서 남자친구와의 대화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화창에 천천히 적었다.

[방금 낙태했고 나는 이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만약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신 보지 말자.]

길지 않은 메세지를 몇 번이고 적었다 지우다가 보내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남자친구를 차단했다. 답장은 어찌 되도 상관없었다. 메세지를 보내고 친구 목록을 보자 나에게 온기를 나누어주었던 친구들의 이름이 보였다. 나는 메신저 상태메세지 변경 버튼을 누르고 다음과 같이 적고서 휴대폰을 껐다.

‘낙태죄 전면폐지는 끝이 아니다. 진짜 싸움의 시작을 위한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모해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바로가기: <한겨레> 특별 페이지 ‘낙태죄 폐지’

▶바로가기 :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셀렉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한겨레가 필요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