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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s://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나를 낳았어요 ㅣ 정라윤
인류 대중의 여행이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을 건너기 시작했을 때 – 비록 과거 쪽으로의 일방향이더라도 – 그 양상은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상상하던 거창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이전의 '여행'에서 착안한 방식, 즉 특정 장소로 이동해 체험하는 것과 달랐다는 뜻이다. 그것은 차라리 비디오 통신 기술의 발명과 발전과 더 연관이 있었다. 과거 시기 곳곳에 설치한 통신기를 통해 당대 인물과 소통이 가능해지는, 조금은 시시한 모습이었으니까. 통신기를 사용하면 시공간의 틈새로 들어가 화상 통화와 비슷한 상호작용을 하고 본래 시간대로 돌아오는 식이었다.
과거와 연결해 지나간 시간을 바꾸어도 괜찮을까? 막연한 상상일 때에는 첨예하고 까다로운 고민이 될 것 같았지만, 막상 몇 번의 신중한 초기 시도 끝에 그러한 질문은 부질없이 증발하였다.
우선 과거에 통신기를 설치하고 과거의 인물과 닿았을 때, 그들과 언어 소통이 전혀 가능하지 않은 시점이 어느 지역에나 존재했다. 가까스로 언어 소통이 가능한 시기의 인물 중에서도 그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납득시키는 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매우 중차대하고도 기묘한 구석이 있었는데, 어느 시점 과거의 인물과 소통에 성공해 알던 역사가 바뀌더라도 본래 시간대로 돌아온 순간 바뀌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 눈치챌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미 지워진 역사들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기록되지 않은 채 시공간 틈새 어딘가로, 사라지는 줄도 모르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아무도 과거에 미친 영향을 몰라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질문의 의미 역시 함께 사라져 버렸으니.
가까스로 바뀌어 버리는 미지의 역사에 대해 인류가 알아챘을 때, 머리를 맞댄 고민 끝에 시간 여행은 몇 가지 단순한 규칙만 남기고 간편하게 대중화되어버렸다. 이 어처구니없는 결정 또한 바뀌어 버린 역사의 인과인지 모른다.
<규칙>
1. 시간 여행이 발명된 중대한 시점과 일정 부분 연관된 범위의 여행은 제한될 수 있다.
2. 보통 등급의 일반 여행자는 자기 삶에 관련된 시간대에만 여행을 신청할 수 있다.
3.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변화에 대한 책임은 여행자 본인에게만 있다.
이 규칙이 달랐던 역사와 그 변화를 끌어낸 여행은 있었을까? 이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남성 청년인 표은우가 시간 여행사에 접수를 한 것에는 나름의 비장한 목적이 있었다. 표은우의 양친은 아들을 살뜰히 사랑하고 보살피는 나무랄 데 없는 양육자였으나, 표은우에게는 몇 가지 불만이 있었다. 그가 살아온 시간대를 기준으로 한 역사에서, 표은우가 태어난 해에 한국에는 아직 남아 선호 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완곡해지기는 했어도 표은우와 그 엇비슷한 연령의 한국인은 남성 수가 여성 수보다 월등하게 많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 갈등이나 이성 반려자가 없어 외로운 남성들까지. 표은우는 이 모든 것들이 불편했으며 또 외동으로 자라며 의지할 동기가 없는 것도 몹시 아쉬웠다. 표은우를 몹시 사랑해준 양친은 불행히도 당시의 기대 수명에 터무니없이 모자란 나이에 작고하고 말았는데, 그러고 나니 표은우는 고독 속에서 어머니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아이를 하나만 낳고 싶었는데, 기왕 하나뿐이라면 아들이 낫다고들 그랬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단다. 첫 임신 때는 엄마 아빠가 너무 어리고 불안정하기도 했고, 좀 더 자리를 잡고 아들을 고대해 낳아 정성껏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이런 한심할 데가 있나! 그 어리석은 남아 선호 출생 시기에 바로 그의 양친이 기여한 것이다. 그는 적은 여성 인구 때문에 생기는 갈등들, 특히 그 시기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여성 보호론자들의 피곤한 떽떽거림과, 애지중지 저를 사랑해준 부모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던 자신의 고독에 분노했다. 그래서 홀연 어느 날, 표은우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자기 삶에 관련된 역사를 아주 조금만 바꿔보면 어떨까?
시간 여행 후의 표은우에게는 우애 깊은 누나가 있을 것이고, 지금 그를 괴롭히는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표은우가 되어 있는 것이다. 멋지잖아?
그런 기대 속에 표은우는 들뜬 마음으로 시공간의 틈새 속으로 걸어갔다. 결혼 직전 새파랗게 젊은 어머니의 생 어느 지점이 그의 여행지였다.
* * *
"응? 이게 뭐지?"
자기 기억보다 훨씬 앳되고 소녀 같은 어머니의 형상이 나타났을 때 표은우는 새삼스럽게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감상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엄마…!"
"네?"
갑작스러운 시공간의 뒤틀림 직후 홀연히 나타난 자기 또래 남자가 대뜸 엄마라고 부르다니, 표은우의 모친이 될 여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지 마세요. 저는 몇십년 뒤의 미래에서 온 엄마의 아들이에요. 시간 여행을 해서 엄마를 만나러 왔어요."
"시간 여행…?"
여자가 갑자기 불려 오기 직전 시간대에 뉴스에서는 연일 시간 사이의 이동 연결고리를 찾아낸 이론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표은우도 대충 시기를 짐작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어머니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어머니의 시간대에서는 이론의 실마리를 찾아낸 정도로만 알려지기 시작했겠지만, 사실은 이론이 완성되고 몇 번의 실험도 성공해 모든 기반은 완성된 후였으니까. 표은우가 신청한 시간 좌표는 제한 범위 밖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여자는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처럼 그냥 평범하게 사는 사람의 아들이 그렇게 민감한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고…?"
음, 아직 제대로 모르시나 보네. 표은우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아니, 엄마. 여기서 시간 여행은 접수만 하면 어렵지 않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고, 시간 여행이나 역사 연구 같은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아요."
"누구나…?"
경계심이 섞인 황당한 반문에도 표은우는 참을성 있게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제가 여기 온 것이 맞는다는 의미로.
"긴 이용은 조금 비싸서, 이렇게 엄마랑 만나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게 아쉽네요. 그게, 사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하고 싶은 말… 이요?"
조심스러운 존댓말이 조금 어색하고 서운하기는 했지만 표은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엄마는 지금 아빠랑 만나서 약혼했죠? 삼 년 뒤에 나를 낳게 될 거예요. 그런데 그때에는 진짜 이해가 안 되는 아들 선호 사상 같은 게 있어서, 엄마는 내 누나를 낙태하고 나를 외동으로 낳아요. 그걸 하지 말라고 말하러 온 거예요. 고작 스무 해 남짓만 지난 지금 엄마 때 사람들이 너무 어리석은 책임을 우리가 고스란히 떠맡게 된다고요. 게다가… 엄마는 형제자매가 있어서 모르겠지만, 외동으로 자라는 건 너무 외로워요.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건 감사하지만 엄마 아빠 말고는 의지할 가족이 없게 두다니 좀 무책임하지 않아요?"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니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져서였을까, 표은우는 계획했던 것보다 더 속사포처럼 하소연을 늘어놓게 되었다. 자기가 기억하는 것처럼 자기와 친근하지 않은 여자가 솔직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까지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어머니에게 누나를 낳아줄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조바심도 표은우가 평소보다 일방적으로 제 말을 늘어놓는 것에 기여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아시겠죠? 나중에 우리 부모도 지탄받는 그런 짓에 일조했다는 걸 알고 얼마나 창피했다고요. 누나를 낙태하지 마세요. 여자애라고 골라서 낙태하다니, 요즘 시대에서 보기엔 얼마나 야만적인지."
"야만적이라고?"
"네! 아이참, 잘 이해하셨는지 모르겠네. 생각보다 시간이 짧네요. 저는 금방 돌아가야 해요. 엄마, 알았죠?"
"… 그러니까…."
"앗, 더 있으면 초당 추가금을 물어줘야 하는데. 이제 종료예요. 내 말 꼭 명심해요!"
눈앞의 어머니가 본래 시간대로 돌아가며 사라지고, 표은우는 그것이 제대로 종료되었다는 뜻임을 알았기에 안심하며 자동으로 복귀될 것을 기다렸다.
"……?"
그런데 분명 들어올 때처럼 순식간에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것이 꽤 지체되고 있었다. 시공간의 틈새가 비치는 위화감이 슬슬 불편하게 느껴질 무렵, 어딘가로 이동이 시작되었다. 흠, 원래 복귀는 조금 다른가?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무언가 이상했다.
"여기가 아닌데?"
자기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았다. 이 중립 틈새의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약간의 불쾌하고 낯선 감각이 온몸을 스쳐 표은우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아, 또 한국 남자로군."
눈을 뜨니 여전히 어디도 아닌 중립 시공간 틈새처럼 보이는 곳에 와글와글하는 인간들이 나타났다. 다양한 민족인데, 전부 남자인 점만 빼고 공통점은 별로 없었다.
"자네도 어머니를 만나러 갔나?"
"저도라니요? 여기가 어디죠? 무슨 오류인가요?"
"오류가 아니야. 아니, 맞을까? 글쎄, 우리가 짐작하기로는 적어도 시간 여행 시스템의 책임은 아닐세."
자기에게 말을 건 남자는 표은우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는데, 조금 딱하다는 듯, 알겠다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옆에서 표은우를 힐끗 보고는 휙 고개를 돌리며 무심한 표정으로 있던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가 별안간 노성을 질렀다.
"그래! 모든 결과는 여행자 본인의 책임이다 이거지! 오류일 리가 있나!"
"쯧, 신경 쓰지 말게."
당황하는 표은우에게, 처음의 남자가 달래듯 말했다.
"저 친구는 불만스러워하는 쪽이라서. 여기가 어딘가 하면, 시간 여행 때문에 태어난 사실이 사라져 자기가 살던 역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인간들이 오게 되는 곳이라고 추정하고 있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출생과 관련한 인물의 시점으로 여행한 사람들이거든."
"뭐라고요? 내가 태어난 사실이 사라졌다고요?"
"그런 것 같아. 자네는 누구를 만났지?"
"그… 결혼을 앞둔 우리 엄마랑…. 하지만 말도 안 돼요. 나는 엄마에게 낙태한 누나를 낳으라고 했을 뿐이라고요!"
"하, 지겨운 얘기 구만!"
대뜸 화를 냈던 남자가 콧방귀를 끼고 저 어느 쪽으로 휘적휘적 가버렸다. 먼저의 남자도 대강 알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표은우는 이제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났다. 자기 부모가 연애 결혼 후 진실한 사랑의 결실인 자신의 탄생을 얼마나 고대하며 낳아 귀하게 길렀는지 이 사람들이 뭘 안다는 말인가?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네 원대로 자네 누나는 태어났을 거야. 몇 년생이지?"
"xxxx년… 누나가 태어났어도 무슨 소용입니까? 말도 안 돼! 우리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화목한 사람들이었다고요!"
"쯧, 그때쯤에는 아이는 한 명만 낳아 기르던 추세였지. 첫 아이를 낳고 나면 영구 피임 시술을 받을 때 정부가 지원도 해줬고 말이야."
"우리 부모님이 그랬을 리 없어요!"
"그거야 나한테 말해도 소용없지. 외동아들로 태어났던 사람들이 유독 힘들어해. 좀 오래 걸려도, 뭐. 여기엔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같으니 넉넉하게 쓰게."
남자는 이어질 표은우의 부정기까지 달래 줄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히 또 어디론가 방향도 변화도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표은우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항의를 받아줄 수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픽, 픽, 여기저기서 남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타날 뿐이었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정라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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