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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경력단절 여성 ‘자립’에 필요한 건 ‘처음’이라는 두려움 깨기

등록 2021-03-09 14:34수정 2021-03-09 16:12

[내돈내삶] ‘척수염’ 경력단절 박진희씨
숙박공유플랫폼으로 경제활동 이어가
여행객 숙소 운영으로 경제활동을 다시 이어가고 있는 박진희씨. 사진 박진희
여행객 숙소 운영으로 경제활동을 다시 이어가고 있는 박진희씨. 사진 박진희

지금 여자들에게 필요한 건 부모 돈, 남편 돈이 아닌 바로 내 돈입니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의 ‘내 돈’은 단순한 ‘자산’이 아닌 주체적이며 독립적인 ‘나의 삶’을 위한 도구입니다. 1929년 ‘영국 여자'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에서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바로 나만의 공간과 생활비죠. ‘내돈내삶’은 여성들의 재테크에 머무르지 않고, 경제적 자립과 독립적 삶을 꾸려가는데 길잡이가 되는 여성 또는 모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빨리 경력단절이 온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통 40대에 고민하던데 전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30대에 고민했죠. 몸이 조금 좋아진 뒤 새로운 도전을 했어요. 혼자 살기 처음, 도시를 벗어난 것도 처음, 숙박업도 처음이었지만, 천천히 조금씩 하다보니 어느새 되더라고요.”

제주시 노형동에서 숙박공유플랫폼 에어비앤비를 통해 여행자 숙소를 운영하는 박진희(43)씨는 한창 일할 나이였던 33살에 희귀질환 진단을 받았다. 논술강사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고교생 입시 지도를 하며 치열하게 일하던 때였다. 가만히 있어도 오른팔이 터질듯 아팠고 20분 걷기도 힘들었다. 신경이 지나는 척수에 염증이 생기는 척수염이었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2014년 결혼생활도 정리하고 홀로 제주도로 내려왔다. 숙박공유플랫폼을 통해 다시 경제활동을 이어가게 된 박진희씨와 지난 5일 서면 인터뷰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병에 걸렸어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사회 활동도 못 하고 집에서만 지냈는데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으니 막막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자연에서 몸을 돌보기 위해 사시사철 푸르고 따뜻한 제주도에 오는 결정을 했죠.”

박진희씨가 운영하는 여행자 숙소에서 한라산이 가깝게 보인다. 사진 박진희
박진희씨가 운영하는 여행자 숙소에서 한라산이 가깝게 보인다. 사진 박진희
건강을 위해 제주에 왔지만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체력이 약한 30대 여성이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출퇴근 부담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한 끝에 그는 여행객들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숙소를 운영하기로 했다. 한라산이 보이면서 걸어서 5~7분 내 마트가 있어 생활이 편리한 건물을 임대해 여행객들이 머무는 숙소를 마련했다. 숙소 인테리어도 직접 하고, 텃밭에서 키운 것을 여행객과 나누며 새 터전을 일궜다.

“제주에서도 일을 해달라는 곳은 있었는데 제가 규칙적으로 출근할 수 있는 체력이 아니었어요. 여행자들에게 공간을 대여하면서 다시 일도 하고 경제 활동을 영위하게 됐어요. 평소엔 단기 손님을 받고, 몸이 안 좋을 땐 장기 손님 받는 식으로 해서 제 일을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때도 있었지만 박씨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1박에 약 10만원인 숙소 이용료에서 플랫폼 수수료와 임대료, 운영비 등을 빼면 남는 건 많지 않지만 그의 생활비로는 족하다. 아이티(IT)기술이 발전하면서 생긴 디지털 플랫폼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었고, 박씨처럼 기존 노동시장에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이들에겐 힘이 되었다.

“제 체력 때문에 작은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면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제주에 오기 전엔 많이 벌어서 많이 소비하는 삶을 살았죠. 제주에선 적게 쓰면서 자급하는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어요.”

박진희씨가 운영하는 제주 여행자 숙소의 내부. 사진 박진희
박진희씨가 운영하는 제주 여행자 숙소의 내부. 사진 박진희
박씨가 운영하는 ‘제주 리틀포레스트 렌탈하우스’ 투숙객 가운데 여성 비율은 60% 정도다. 여자친구끼리, 나이든 엄마와 딸, 어린 자녀와 젊은 엄마,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의 발길이 머문다. 박씨는 숙소에서 어떤 ‘안전함’을 느끼기에 여성 여행자가 많이 찾는 것 같다고 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깨끗한 덕도 있지만 그런 숙소는 제주도에 많죠. 여성분들이 저희 숙소에 찾아오시는 이유 중 하나는 익명성 짙은 호텔과는 달리 살림집이 같이 있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일 것 같아요.”

박씨가 운영하는 에스엔에스(SNS)에는 손님들이 손글씨로 적고 간 편지와 사진이 가득하다. 육아휴직을 마무리하는 여행을 온 직장맘, 뱃 속 아기와 함께 온 임신부 등의 사연이 정감있게 적혀있다. 여행객들이 쓴 정성 어린 방명록에 주인장 박씨가 쓴 답편지까지 여행자들의 발자취가 차곡차곡 쌓였다.

여행객이 남긴 손편지.
여행객이 남긴 손편지.
올해로 여행자 숙소를 운영한지 5년째인 박진희씨는 또래의 1인가구 여성에게 삶의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그의 손에 닿는 일들이 있었고, 한발짝 내딛다 보니 새 길이 생겼다. 박씨는 에어비앤비에서 15분기 연속 모범 운영자로 선정됐다.

“낯선 땅에서의 삶을 시작했어요. 마음을 담아 하다보니 되더라고요. 제 또래 여성들이 나이 때문에, 아이 때문에 새 삶을 시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바로가기 : [내돈내삶] 연재

https://www.hani.co.kr/arti/SERIES/1540/home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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