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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끝 모를 성착취물 삭제…나도 촬영된건가, 불안까진 못 지워

등록 2021-03-15 16:18수정 2021-03-16 10:54

[조주빈 검거 1년]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다른 범죄는 가해자가 잡히고 처벌받으면 피해가 일단락되는데 디지털 성범죄는 그렇지 않아요. 무한의 공간에서 무한의 가해가 이뤄져요. 한 명의 가해자가 수십 년형을 받더라도 온라인 공간엔 또 다른 수많은 가해자가 남아 있죠. 그들의 하드웨어에 피해영상이 계속 남아 있고, 언제든 다시 사이트에 올라옵니다. 피해가 무한 반복되는 거죠.”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있다. ㄴ씨는 지원센터에서 성착취물 등 디지털 공간에 퍼진 피해영상을 삭제하는 업무를 한다.

디지털 성범죄는 날로 진화한다. 디지털 공간에 숨은 가해자들은 누군가 즐겁게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사진을 조작해 성착취물로 퍼뜨린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한 딥페이크 불법영상은 우리 모두를 잠재적 피해자 목록에 올려둔다.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의 가해자 조주빈(박사방 운영자)이 지난해 3월16일 경찰에 붙잡혔다. 1년이 지났다. 조씨에게는 1심에서 모두 징역 45년형(성착취물 유포 40년, 범죄수익 은닉 5년)이 선고됐다. 두 달 뒤 붙잡힌 엔번방 첫 개설자 ‘갓갓’ 문형욱의 1심 재판도 선고만을 남겨두고 있다.

엔번방 사건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숨은 가해자 집단의 크기를 고려하면 붙잡힌 몇몇은 거대한 데이터 속 작은 ‘바이러스’에 불과하다. ㄴ씨는 “온라인 공간에 있는 거대한 가해자들은 단지 조주빈이 실수해 붙잡힌 것이라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세계에선 45년 간 이 사회에서 ‘오프라인’된 조주빈을 “마치 영웅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온라인 공간에 빠져있는 가해자들은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가는 걸 마치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날 수 있는 일종의 게임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처벌받는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텔레그램 엔번방 사건이 한국사회에 남긴 충격과 대중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며 잦아든 듯하지만, 무한대로 복제하는 또 다른 엔번방과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한겨레>는 디지털 성범죄 실태를 매일 눈으로 확인하며 디지털 공간에서 제작자, 유포자와 끝없는 싸움을 하는 ‘성착취물 지우는 사람들’을 만났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엔번방 첫 개설자 문형욱(갓갓) 1심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엔번방 첫 개설자 문형욱(갓갓) 1심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ㄴ씨는 2018년 4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가 만들어질 때부터 4년째 성착취물 삭제지원 업무를 하고 있다. 지원센터에서는 피해자 신고가 들어오면 △유포 범위 파악 △긴급 삭제 지원(플랫폼별 삭제요청,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차단요청, 경찰 제출 채증자료 작성) △재유포 모니터링 등 신속한 삭제를 최우선으로 한다. 유해 사이트를 사전 모니터링하다가 성착취물 영상이 올라오면 바로 삭제하기도 한다.

지원센터는 지난 3년간 월 평균 9000여건(2021년 1월 기준)의 삭제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지난해에는 15만8760건을 삭제했다. 하루 평균 434개 피해 영상물을 지운 셈이다. 지난해 지원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만 4973명이다.

“불법촬영 영상, 외상 느낄 정도로 충격적”

“피해촬영물을 찾기 위해서 들어가는 사이트엔 피해자의 촬영물만 있는 게 아니에요. 진짜 막… 동물학대 영상이 있는 경우도 있고요. 가해자들이 점점 자극적인 영상들을 원하고 있어서 성폭력 영상, 특히 피해자를 학대하는 영상들이 늘고 있고요. 가해자들이 가학에 재미를 느끼는구나 싶은 그런 영상들이 많아요.”

ㄴ씨는 업무 시간 내내 유해 사이트를 보고 있어야 하는 고충이 크다고 했다. 특히 공공장소 불법촬영물은 피해자가 촬영 사실을 전혀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신고도 되지 않은 채 인터넷 공간을 떠돌아 다닌다고 했다.

“화장실 불법촬영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걸 보고 제가 정신적 외상을 느낄 정도로 충격을 받아…. 음식점에 갈 때 화장실 풍경을 외우는 습관이 생겼어요. 화장실에 갈 때마다 여기 화분이 있구나 외워두는거죠. 나중에 삭제 업무할 때 그 화분 있는 화장실인가, 내가 촬영됐나, 이런 확인을 하는 강박까지 생겼어요.”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엔번방 첫 개설자 문형욱(갓갓) 1심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엔번방 첫 개설자 문형욱(갓갓) 1심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ㄴ씨와 함께 4년 째 성착취물 삭제 업무를 하는 ㄱ씨는 이 일을 시작하고 아예 사진 자체를 찍지 않는다고 했다. 친구와의 만남 등을 비롯해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최근 찍은 유일한 사진은 일터에서 직원들과 찍은 단체사진 한 장뿐이다. “친구들 폰에 제 얼굴이 사진으로 저장돼 있다가 해킹되거나 클라우드에 올라가면 어떤 식으로든 도용될 수 있다는 불안이 큰 것 같아요.”

지원센터 직원들은 감정노동자보호법의 보호 대상이다. 지원센터가 만들어지고 얼마 뒤부터 상담자 및 삭제 지원자들은 트라우마 상담을 받고 있다. “2018년 예산을 확보해 그 이후부터 직원들은 일대일 심리상담을 받고 있어요. 이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아니었으면 진즉에 그만뒀을 거 같아요.”(ㄴ씨)

조주빈을 ‘브랜드’로 여기는 가해자들

ㄱ씨는 조주빈·문형욱 등이 붙잡히며 디지털 성범죄가 공론화됐을 때 “가장 화가 났다”고 했다. “충격적인 게 이들이 잡히자 피해 영상물이 더 빠르게 많이 유포되는 겁니다. 붙잡히자 그들의 이름이 유명한 상표가 됐고, 다른 가해자들이 ‘나 이거 수집했다’고 자랑하고…. 잡히지 않은 사람들이 조주빈보다 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피해 영상물 유포자들 가운데는 해킹 능력을 가진 이들도 있다. 지원센터도 언제든 표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ㄱ씨는 “그래서 보안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스마트폰을 다루고, 코딩을 배우는 젊은 세대가 디지털 기술엔 익숙한데 디지털 윤리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은 안타까워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는 메신저 단체 채팅방에서 불법 촬영물을 받았거나 유포를 목격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물었다.(2019년, 1000명) 조용히 혼자 봤다(64.9%), 그냥 내버려뒀다(51.5%)는 응답이 많았다. 사진·영상을 품평했다(38.7%), 타인에게 재전송했다(18.6%), 다운로드했다(11.9%)도 많았다. 경찰 등에 신고했다는 2.6%뿐이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디지털 성범죄를 물리적 폭력에 비해 가볍게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강간이라 하면 무척 놀라는데, 유포라고 하면 별일 아니라 생각하죠. 본인이 온라인에 뭔가 게시한 걸 유포라고 생각하지 못하기도 합니다.”(ㄱ씨)

몇 년 사이 법망은 촘촘해지고 있다. 지난 1월 성폭력방지법이 개정돼 불법 촬영물 유포 피해에 대해 삭제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를 당사자에서 대리인까지 확대했다. 지난달 국회는 청소년성보호법을 개정해 온라인에서 아동·청소년에게 성적 행위를 하도록 유인하는 ‘온라인 그루밍’ 행위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하거나 수출입하는 범죄의 공소시효도 폐지됐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ㄱ씨와 ㄴ씨는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되는 판례를 만드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ㄱ씨는 “엔번방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국회에서 오래 계류됐던 디지털 성범죄 관련 법들이 최근 많이 개정됐다. 법이야 개정됐지만 제대로 된 가해자 처벌로 이어질 수 있을까 아직도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처벌이 잘 되려면 판례를 잘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등장할 디지털 성범죄를 제대로 처벌할 수 있어요.”

엔번방 사건 핵심 가해자와 비슷한 수법으로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이들에 대한 처벌이 낮은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6월 대구고법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1300여개를 제작·유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아무개씨에게 항소심에서 1심보다 6개월 낮은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신아무개씨도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선 집행유예로 감형됐다.

인력 늘렸지만 계약직 고용탓 업무 연속성 보장안돼

이제 몰래카메라를 ‘불법 촬영’으로, 리벤지 포르노를 ‘디지털 성범죄’로 고쳐 부른다. 청소년성보호법의 음란물은 ‘성착취물’로 바뀌었다. 몇 년 사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공조 없이 국내법 강화만으로는 디지털 성착취물 유포를 막을 수 없다. ㄱ씨는 “지난해부터는 해외 서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포부터 수사와 처벌까지 국제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ㄴ씨는 “해외 여러 나라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에 대한 규정만 있고 성인 성착취물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국가가 나서서 피해 영상물을 지우는 나라는 한국과 호주뿐”이라고 했다.

여성가족부는 올해 1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신속한 지원을 위해 지원센터 삭제업무 인력을 기존 17명에서 39명으로 늘렸다. ㄱ씨와 ㄴ씨는 인원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 영상물의 신속한 삭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업무 연속성 보장이라고 말한다. “22명이 충원됐지만 교육기간 등을 제외하면 몇 달 일하고 나서 1년 계약이 끝난다”는 것이다. 피해 촬영물이라는 민감 정보를 다루는 업무라 보안교육 등을 철저히 해 교육기간이 긴 편인데, 업무에 숙련될 즈음 계약이 종료되다 보니 피해자 지원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ㄱ씨는 “피해 영상물 삭제가 기술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한 사건을 꾸준히 담당한 사람에 의해 삭제 노하우가 축적되는 식이다. 그런데 몇 달 만에 사람이 바뀌면 인수인계도 쉽지 않다”고 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의 착오로 2019년 수치가 2020년 수치로 잘못 보도됐습니다. 지원센터 삭제지원 서비스 수치를 지난해 15만8760건 삭제, 하루 평균 434개, 지난해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 4973명으로 수정했습니다.(3월16일 오전 10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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