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피크닉. 사진 임지선 제공
많은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소위 구매 대란으로 화제가 된 곳이 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샤넬 매장이나, 최신 아이폰을 파는 애플 스토어냐고? 아니다. 서울 중구 회현역 인근에 있는 복합전시공간인 피크닉(Piknic)이 바로 그곳이다.
이곳에서 명품 화분 ‘듀가르송’을 구매할 수 있는데, 이걸 사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선다. 화분이 뭐 별거냐고? 천만의 말씀. 국내 토분 브랜드인 듀가르송은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어지는, 그야말로 명품 화분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심지어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중고 화분이 새것과 같은 시세로 또는 웃돈을 얹어 거래되고 있다. ‘토분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파는 곳도 드물어 가드닝에 열광하는 많은 이들이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는 토분이다. 마침 피크닉에서 6월부터 시작한 전시 ‘가드닝’(Gardening)의 일환으로 듀가르송 팝업스토어를 최초로 진행했는데, 한정판으로 풀리는 이 토분을 구매하기 위해 길고 긴 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토분은 다 팔린 상태다.
듀가르송의 토분. 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화분을 갖기 위해 줄을 서고 중고거래를 한다는 것도 의아한데 이 전시의 주제 역시 흥미롭다. 정원에 대한 미학적 관점과 식물 가드닝이라는 실용적 이야기를 주제로 전시를 일구었다. 식물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관람료를 기꺼이 내고 있다. 아니 밖에 나서면 세상천지가 식물인데, 무슨 식물을 보러 가는 데 돈을 쓰냐고? 봉이 김선달이 물이 없어서 물을 판 게 아니지 않는가. 물을 사 먹는 것이 어색하게 보이던 게 불과 30년 전이다. 이제는 수많은 생수 브랜드들이 익숙하게 머리에 떠오를 만큼 사 먹는 물이 시장에 자리를 잡았고 사서 보는 식물, 사서 키우는 식물이 브랜드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식물을 먹는 대상에서 즐기는 대상으로, 나아가 식물을 매개로 취향과 삶을 향유하는 흐름이 적잖이 눈에 띈다. 나 역시도 최근에 식물 구독 서비스와 관련한 잡지 인터뷰를 진행했고, 식물과 관련된 전시 의뢰를 받기도 했다. 올 상반기만 돌아봐도 팟값 상승으로 인한 연예인의 파테크, 화분 줄서기 대란, 식물을 주제로 한 전시와 행사들이 많아지는 등 식물에 대한 언급이 잦아지고 있다. 확실히 브랜드 트렌드에 있어 반려동물만큼 반려식물이 주목받고 있다. 어머니들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베란다 화초 키우기는 이제 홈가드닝이라는 세련된 단어로 2030 세대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홈가드닝, #베란다가드닝으로 해시태그를 검색해보면 무려 40만개가 넘는 게시물들이 나온다. 나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수단이자 취향으로 식물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식물성 도산 안에서 수경재배되고 있는 바질. 사진 임지선 제공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인근에 새롭게 생긴 ‘식물성 도산’을 미리 다녀와 보니 식물이 브랜드로서 갖는 다양한 가치를 콘셉트로 잘 내세운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식물의, 식물에 의한, 식물을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애그리푸드 테크 기업 엔씽(n.thing)이 선보인 식물성 도산은 스마트팜 쇼룸이자 카페다. 회색빛 깔끔하고 세련된 외관을 지나 안에 들어서면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아크릴과 스테인리스 스틸을 사용한 가구 디자인, 컨베이어 벨트, 인공조명 등 미래지향적인 공간 디자인 사이에 풍성하게 자라나는 식물들, 컨베이어 위로 돌아가고 있는 바질, 신선하게 담겨 포장된 로메인과 버터 헤드 등 언뜻 보면 다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식물성 도산의 컨테이너 수직농장 ‘큐브’. 사진 임지선 제공
지난 7일 정식으로 문을 연 식물성 도산은 ‘지구와 화성 사이에 위치한 신선함의 별’을 콘셉트로 내세운다. 엔씽의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시각화한 복합 공간으로, 매끈하게 갖춘 디자인 가구들도 눈에 들어오지만 무엇보다도 컨테이너 수직농장인 ‘큐브’가 재미있다. 매장 속 인스토어팜으로 큐브가 설치되어 있어 음료를 마시며 실시간으로 성장 중인 식물의 과정을 감상할 수 있다. 스웨덴산 완두콩으로 만든 두유 음료 ‘식물성 화이트’나 생바질을 레시피로 개발한 ‘바질 파인 소르베’를 맛보고 수경재배 키트를 둘러본 후 쇼룸에서 키워낸 다이닝 채소를 구매해 집으로 돌아가는 이 총체적인 브랜드 경험이 매력적이다.
식물을 주제로 한 브랜딩 디자인부터 스토리텔링, 공간의 시각적 정체성, 그리고 자연스러운 구매 연동이 아주 매끄럽게 흘러갔다. 보는 재미를 넘어서 맛보는 재미까지 가득했던 공간. 물론 이곳 외에도 식물을 매개로 하는 공간들이 많이 생겨나고 또 주목받고 있다. 서울 강남 수서동에 있는 ‘식물관 PH’는 전시공간이자 식물원인 복합 공간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공간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식물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관람하는 모든 식물은 구매가 가능하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시 역시 식물과 자연을 모티프로 해 그 어우러짐을 우선으로 두고 작품과 작업을 섬세하게 구성하고 있다. 식물이 브랜드 콘텐츠로서 갖는 훌륭한 다면성을 잘 엮어내고 풀어내는 것이다.
식물과 전시가 어우러지는 공간 식물관PH. 인스타그램 갈무리
식물은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브랜드다. 살아있는 유기체로 나와 같이 성장하고 자라나며 생의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식탁 위 소중한 재료가 되어 주기도 하며, 가드닝 등 식물을 매개로 파생되는 여러 브랜드의 모체가 되기도 한다. 식물성 도산이나 식물관 PH처럼, 유기적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을 구성해 독특하고 특별한 브랜드 경험을 생성하기도 한다. 그간 배경처럼 여겨지던 식물이 무대의 주연으로 막 올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19로 인한 집콕생활, 기후변화로 상승하는 채솟값 등 환경적 요인도 분명 이유가 되겠지만, 내게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조연이 드디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차례가 왔다는 생각도 든다. 식물의 가치와 본질을 조명하고 고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공간이 자꾸만 궁금해지는 까닭이다. 누구보다 배경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식물이 브랜드의 주연이 되어 구성해가는 공간은 얼마나 농밀하고 섬세할지, 기대해도 좋겠다.
임지선 브랜드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