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어느 날 저녁. 야근을 마치고 귀가한 아내의 표정이 어두웠다.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전세 만기가 되면 집을 빼달라고 했다는 거다. 2년 실거주 요건을 미리 갖춰놓기 위해 자기가 들어와서 살 계획이니 이사할 곳을 미리 알아보라는 얘기였다. 정말로 집주인이 들어와서 살 생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되었건 우리는 이듬해 집을 비워줘야 했다. 이런 예상 못 한 상황이라니.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랴부랴 노트북을 열어 포털 부동산 페이지부터 검색했다. 우리가 사는 서울 목동 아파트 1단지에는 전세 매물이 없다. 옆에 붙어 있는 2단지, 3단지 역시 마찬가지다. ‘전세 씨가 말랐다’는 말이 이렇게 와닿았다. 길 건너편에 있는 다른 아파트 단지에는 월세가 있긴 한데 우리가 처음 이사 올 때와는 시세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세금을 빼고도 월세로 100만원 넘게 더 얹어줘야 지금 사는 면적과 비슷하거나 더 작은 평형의 아파트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아파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교육환경이 좋다는 이유로 목동으로 이사한 건데 다른 곳으로 또 전학한다면 이제 겨우 적응해가는 아이한테 못할 짓이다. 흩어진 멘탈을 주워 담다 생각을 정리해봤다. 또 다른 비슷한 아파트 전세를 찾았다고 치자, 그런데 2년 뒤 같은 상황을 맞는다면? 그땐 전세 씨가 마르다 못해, 멸종 상황은 아닐까.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가족이, 이사 사이의 간격 조정을 못 해 숙박업소에서 몇 달을 살았다는 도시 괴담도 떠올랐다.
그렇다면 아파트를 사야 할까? 동네에 있는 30평대 낡은 아파트 시세를 찾아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비싸다고? 아파트보다 저렴하지만, 다세대주택(빌라)을 매입하는 건 주거 만족도가 낮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파트보다 주차 등이 불편한 건 사실이니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낡은 단독주택을 사서 내가 원하는 대로 고쳐 쓰거나 새로 짓자’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와 학원들을 중심으로 멀리 벗어나지 않는 반경을 지도에서 들여다보니 큰길 건너 주택단지에 꽤 괜찮은 가격에 올라온 단독주택 매물이 보였다. 대부분 198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집이지만 매수 비용에 설계비, 건축비와 행정비용까지 더한다 해도 여기저기 긁어모으면 해볼 만하다는 ‘무모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의 집짓기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사실 단독주택은 아주 멀리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손에 잡히지 않을 듯한 나의 로망이었다. 어렸을 때는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조그만 마당에 아버지가 시멘트를 비벼 만든 조그만 연못엔 금붕어가 몇 마리 살았다. 고양이도 키우고 멍멍이도 키우던 어린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아파트로 이사했고 40년 넘게 공동주택에서만 살아왔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붙어 있고 내가 원하는 것만 갖춘 집에서 사는 건 꿈처럼 멀게 느껴졌던 거다.
동네 골목길을 뒤진 끝에 찾아낸 낡은 벽돌집. 칠이 벗겨지고 시멘트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지만 네모 반듯한 땅에 40년 가까이 튼튼하게 서 있었다. 임호림 제공
사실, 아파트에서 밀려나는 게 현실이 되기 몇 해 전부터 틈나는 대로 집을 보러 다녔다. 지도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구경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괜찮아 보이는 매물을 발견하면 중개업자와 약속을 잡고 주말에 찾아가 보기도 했었다. 돈 드는 일도 아닌데다 근처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 일종의 취미생활이 되었다고나 할까.
임대인의 전화를 받은 다음 날부터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하고 며칠 동안 동네를 걸어 다니며 뒤져보던 끝에 딱 마음에 드는 집을 만족스러운 가격에 계약했다. 1983년에 빨간 벽돌을 쌓아 지은 2층짜리 양옥이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시멘트 난간 귀퉁이는 갈라져 떨어져 나간 곳이 보인다. 주인 부부는 오랫동안 봉제 외주 일을 하셨다는데, 1층을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담과 건물 외벽 사이에 샌드위치 패널을 지붕처럼 덮어 내부 현관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2층은 가족들이 쓰기에 좁지는 않았지만, 얇은 벽돌을 쌓아 슬라브를 올린 그 시절에 지은 집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단열이 안 되어 보일러를 틀어놨다는데도 꽤 추웠다. 함께 집을 보고 나온 아내가 한마디 보탰다. “집주인 옷 껴입은 거 봤어? 털양말까지 신었던데. 어쩌지? 나 추운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지?” 일사천리로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계약서를 썼다. 잔금일과 매도인 이삿날은 3월 첫 주로 정했다.
이제 첫 단계로 정해야 하는 것은 이 집과 땅을 재료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 것인가다. 선택지는 세 가지다. ①신축. 모두 헐어내고 새로 짓는다. 건폐율과 용적률이 허용하는 범위를 채울 수 있으나 모두 철거하고 기초공사부터 새로 해야 하는 거라 그만큼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②대수선공사. 골조, 일부 벽면, 바닥을 남겨두고 필요한 부분은 철거한 뒤 구조를 보강하고 새 벽을 만드는 방식이다. 용적률이 허용하는 안에서 필요에 따라 증축할 수도 있다. ③단열과 방수만 보강하고 인테리어공사.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벽돌 한두장 두께로 쌓은 벽에 보강을 한다 해도 만족스러운 단열 성능이 나올 것인지는 자신 없다.
고민 끝에, 우리는 대수선공사를 하기로 했다. 아내는 나에게 직접 공사를 해보라고 했지만 부담감이 밀려왔다. 전문가를 통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주변에서 몇몇 건축사를 소개받아 포트폴리오를 확인하고 만나보기로 했다. 되돌릴 수 없는 타이머는 켜졌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여섯달 남짓이었다.
임호림(어쩌다 건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