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면 더 가질 수 있으리라는 욕망을, 아니 그러지 않으면 가진 것마저 잃을 것 같은 불안을 왜 이리 버리기 어려울까”
열대야에 뒤척인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간밤에 너무 더워서 깼다. 거실로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에어컨이 꺼져 있었다. 이토록 푹푹 찌는 밤에 에어컨을 끄다니. R의 소행이었다. 여름이면 에어컨 전쟁이 벌어진다. 나는 켜고, R은 끈다. 에너지 소비를 기피하는 그에게는 에어컨이야말로 사치품이었다. 그를 붙들고 따져봤자 돌아올 말은 뻔했다.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추운 게 자연의 순리 아냐?” 처음엔 무슨 멍멍이 소리인가 싶어 도끼눈부터 떴는데, 곱씹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에어컨을 켜려다 말았다.
온몸이 홧홧한데 깨어 있으려니 맞은편 새 집이 부러웠다. 아아, 나도 저기 살면 좋으련만. 시스템 에어컨이 기본인 저곳이라면 날마다 ‘방방냉방’(방마다 냉방) 천국을 맛보겠지. 에어컨을 켜네 마네 할 필요도 없겠지. 그러나 우리 집은 저곳이 아니고, 낡아빠진 에어컨은 작동하는 것만으로 고마울 지경이다. 새벽 3시, 폭염과 불면에 영혼이 털린 나는 하릴없이 남의 집을 부러워하다 급기야 어떤 집을 떠올리고는 움찔하고 말았다. 열대야 따윈 없을 163억2천만원짜리 펜트하우스. 국토교통부 가격공시에 따르면 그곳은 전국에서 가장 비싼 공동주택이었고, 한 연예인 부부가 사는 집이면서, 내가 기사로 쓴 집이기도 했다.
그 기사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겪은 일이 생생하다. 나는 퇴근길 약국에 들른 참이었다. 수면유도제를 달라고 했더니 약사가 되물었다. “잠을 잘 못 자요?”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금테 안경을 낀 약사였다. 그렇다고 대답하기 무섭게 그가 말했다. “내가 지은 한약 먹으면 머리만 대도 자는데.”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약국에서 한약이라니, 이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섬뜩한 기분에 주위를 살펴보니 유리 칸막이 안으로 다닥다닥 붙은 나무서랍장이 보였다. 그건 진짜 한약 조제실이었다.
“수면유도제 같은 거 먹지 말고, 내 한약 먹어봐. 내가 지은 약 먹으려고 전국에서 다 온다니까. 연예인들도 오고, 중풍 걸린 사람들도 고치는 사람이야, 내가. 의사나 한의사가 못 고친 병도 다 돼.”
아이고야, 어르신. 제가 아무리 멍청할지언정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고요, 말끝은 왜 또 짧아지고 난리세요. 그가 줄줄이 읊어댄 약의 효능은 나사렛 예수가 행한 기적 뺨쳤고, 나는 약사인지 한약사인지 약장수인지 사기꾼인지가 늘어놓는 투머치토크에 기절할 것 같았다. 그날만큼은 내 특유의 예의 바른 척하면서도 가증스러운 리액션을 자제하는 대신, 대놓고 눈길을 피했는데도 그는 몹시 끈질겼다. “이봐”, 마침내 약사가 상체를 기울이더니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삭였다.
“그 비싼 집 사는 연예인 부부 있잖아, 비싼 집 살면 뭐 해. 둘 다 우울증에 불면증이야. 재벌들도 그렇고. 그거 고질병 되기 전에 빨리 고쳐야 해.”
그때 이 한마디를 못 한 게 한스러웠다. ‘아니, 그분들 친척이라도 되세요?’ 가까스로 수면유도제 두 박스와 영수증을 움켜쥐고 나오는데 그 연예인 부부한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영수증 리뷰를 남겼다. ‘★☆☆☆☆’. “사짜 느낌. 양약보다 한약을 더 권함. 약국의 진단 행위, 임의처방에 따른 조제 및 판매는 명백한 불법인데 그걸 모두 하는 곳. 면허대여 약국인지 조사가 필요함.” 내가 쓰면서도 여러모로 어이가 없었다. 기어코 이렇게라도 응징(?)하는 걸 보면 나란 인간도 참 한결같구나 싶었다.
나는 디지털미디어 회사에서 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연예인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 기사를 쓰는 족족 모든 수치가 데이터로 축적되는 일을 하면서야 연예인을 다룬 콘텐츠가 왜 ‘대중’ 문화로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중에도 연예인이 집을 공개하거나 부동산을 매매했다는 기사는 불패에 가까운 아이템이었다. 예상대로 그 연예인 부부의 집 기사는 높은 페이지뷰(PV)를 기록했고, 아이유나 박나래가 억 소리 나는 집을 매입했다는 기사나 가수 비가 빌딩을 사고팔았다는 기사 역시 그랬다.
기사 순위와 페이지뷰가 치고 올라가는 걸 볼 때면 넷마블 게임이라도 하듯 짜릿했다. 이야, 나이스. 이번에도 대중의 욕구를 간파했군.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말을 들려줘야지. 그래, 이 정도는 읽혀야 기사지, 별 읽히지도 않는 글이면 그게 블로그 포스팅이지 뭐람.
여기까지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퇴근한 뒤 침대에 누우면 사념이 밀려올 때가 있었다. 집값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 현실에서 비싼 집을 턱턱 사는 연예인 소식이 위화감이나 허영심을 과도하게 부추기는 건 아닐까? 이제 언론지형은 대중이 원하는 바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수용자중심주의로 바뀌리라는 판단이 그릇된 건 아닐까? 자,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잠이나 좀 자자. 그나저나 2022년에는 선거가 두번이나 있고, 그때 새로운 독자를 유입시키려면 정치인 인터뷰부터 기획해야 하는데…. 나는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동네를 걸었다. 여전히 무더운 밤이었다. 맞은편 새 아파트에 가닿기도 전에 땀이 죽죽 났다. 나는 그곳을 보며 생각했다. 부러운가? 글쎄, 부럽지 않아야 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삶에서 8할은 운이며, 지금까지 내가 성취한 것 또한 운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이미 충분히 가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노력하면 더 가질 수 있으리라는 욕망을, 아니 그러지 않으면 가진 것마저 잃을 것 같은 불안을 왜 이리 버리기 어려울까.
그 약사의 망상과는 별개로 163억짜리 펜트하우스에 살게 되더라도 내 마음이 지옥이면 불면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 한번 해보자. 집에 가서 명상 앱을 켜고, 에어컨을 다시 틀고, 시원한 인견 잠옷을 입고. 여름부터 천국으로 만드는 거지. 나는 예전엔 여름을 좋아했다.
이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1 입욕보단 족욕. 욕조에 몸을 담그면 심부체온을 상승시키므로 역효과 ★★★☆☆
2 샤워는 잠자기 1~2시간 전 미지근한 물로 하기. 차가운 물은 체온을 높이므로 역효과 ★★★★☆
3 냉감 소재 잠옷, 쿨매트, 흡한속건 기능성 침구는 열대야의 기본 세팅 ★★★☆☆
4 에어컨 온도는 너무 낮지 않게. 선풍기로 방 안 공기 순환시켜 온도 유지하기 ★★★★★
강나연(〈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