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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혀에 달라붙는 녹진한 그 맛!

등록 2021-08-06 13:38수정 2021-08-06 14:06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오징어·한치·꼴뚜기 한 가족
숙성하면 부드러운 감칠맛
단, 충분한 경험은 필수!
오징어. 게티이미지뱅크
오징어. 게티이미지뱅크

예전에, 노량진을 새벽에 가면 흥미로운 일이 많이 벌어졌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뭔 조화인지 개복치가 그 큰 몸을 경매장 근처 시멘트 바닥에 누이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개복치는 워낙 커서 그냥 살을 잘라 ㎏ 단위로 팔곤 했다. 당최 알 수 없는 맛이 개복치다. 허연 살에다 또렷한 맛이 없어서 바다의 두부라고 일러도 되는데, 맛있는 두부는 절대 아니다. 여름엔 원래 생선이 별로라, 경매장 경기도 썰렁한 법이다. 그럴 때 대물들이 간혹 눈길을 끌었다. 민어가 몰려오는 날에는 중매인들이 흥분해서 그날 경매장은 후끈후끈했다. 시뻘건 눈을 가진, 거대한 몸체의 민어들이 계체량을 통과한 증거로 크레용으로 쓴 몸무게 쪽지를 몸에 붙이고 노란 상자에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오늘 나온 민어 가격이 다 합치면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은 된다고.”

이런 말을 쉽게 들었다. 고기값이 비싸지면서 한때는 대조군으로 자가용값이 들먹여지다가, 벤츠, 요즘은 강남 아파트가 되었다. 실제 가격이 그리될 리는 없지만, 강남 아파트라고 해야 그날 민어가 얼마나 비싼지 수긍이 되었다.

간혹 돗돔이라고 하는 놈도 있었는데 보통 ‘전설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놈이다. 그 돗돔이 어쩌다 노량진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진짜 돗돔이었을까. 요즘은 잡히면 산지에서 어디론가 바로 사라진다. 귀한 생선의 수요가 생긴 것이다. 부자들의 수와 고급 생선, 희귀 생선의 선호도는 대체로 비례한다. 여름이 제철인 갯장어도 노량진에 더러 나타나서 말도 안 되는 싼값에 팔렸지만 요새는 아주 귀하다. 소매하는 상인도 잘 몰라서 물어보면 ‘그냥 장어래’ 하고 팔던, 그놈의 이빨은 정말 사나운 개처럼 날카로워서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이제 갯장어는 고급 식당에 팔려나가서, 나 같은 삼류 장꾼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대포오징어가 보이던 것도 이즈음인가 그랬다. 정말 155㎜, 아니 육군에서 제일 구경이 큰 8인치(20.32㎝) 포탄처럼 생겼다. 실제로는 몸통의 구경이 그 두 배는 되는 놈도 나오곤 했다. 오징어류는 보통 죽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점차 납작해지는 법인데, 이놈은 죽어서도 포탄처럼 둥근 유선형이었다. 워낙 커서 한마리 사서 비료 포대에 넣어 들고 오면 어깨가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름은 오징어(보통 일본어식으로 ‘대포이카’라고 한다)인데, 한치 계열이라고 보면 맞다. 오징어 종은 다 사촌이어서 한치나 꼴뚜기나 살오징어나 한 핏줄이다. 하기야 한치도 정식 이름은 꼴뚜기에 속한다. 거대한 오징어는 부위별로 맛이 달라서 요리하자고 들면 무궁무진하다. 쪄도 좋고, 볶아도 된다. 살을 발라서 꼬챙이에 끼워 구워도 좋다. 물론 회를 치는 게 으뜸이다. 싱싱할수록 한없이 투명에 가깝고, 죽은 지 오래되면 하얗게 불투명해진다. 장사꾼들이 수완을 발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것 좀 보라고. 숙성이 잘되었구먼. 회 치기 딱 좋게 아주 몰랑몰랑하네.” 죽은 지 좀 되어서 오징어 살이 부드러워지는 걸 숙성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동물의 살은 시간이 지나면 썩는다. 그 타이밍에서 부패냐 숙성이냐 판단하는 건 결국 경험 많은 선수가 결정한다. 흔한 생선 횟감도 치즈 향이 나도록 숙성하는 전문가도 있다. 뻔한 광어와 참돔 같은 생선을 저온 냉장고에 2주, 3주나 숙성하기도 한다. 우리네 상식을 넘어서는 기술은 때로 용감한 도전이 만들어낸다.

오징어나 한치도 싱싱한 놈을 받아 일부러 숙성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에 쓴 것처럼 불투명해지는데, 통제할 수 있다면 이런 숙성은 깊은 맛을 낸다. 온도 변화가 적은 저온 냉장고가 필요하고, 충분한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지금 ‘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라는 자막이 나가고 있다). 입에 넣으면 혀에 쩍 들러붙어 버린다. 산 오징어가 입안에서 단단하고 발랄하게 튄다면, 숙성된 살은 녹진하게 퍼진다. 씹으면 화사하게 즙이 흘러서 입안을 충만하게 만든다. 다리도 워낙 커서 꼬치에 끼워 숯불에 구우면 끝내준다. 그래도 남는 것들은 국이나 찌개를 끓인다. ‘살밥’(두툼한 살의 부피감을 뜻하는 이 바닥 용어)이 좋아서 초밥 쥐는 요리사들이 아주 좋아한다던데, 이제 여름도 끝나가니 슬슬 수산시장을 돌아보면 나올지도 모르겠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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