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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질린 그 생선 임연수, 나이 들어 그 맛 알아버렸네 [ESC]

등록 2023-11-18 10:00수정 2023-11-18 22:13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임연수어 구이
과거 흔하게 냉동으로 유통
의정부 시장 장인이 구우니
바삭한 껍질에 쫀쫀한 살점
경기 의정부 제일시장 ‘한양집’의 임연수구이.
경기 의정부 제일시장 ‘한양집’의 임연수구이.

우리 동네에는 시장이 없다. 신흥지역이라 원래 없었던 것 같다. 시장 없는 동네는 죽은 동네다. 못난이 채소나 과일도 못 구하고, 표준 품목이 아닌 별난 생선은 마트에선 살 수 없다. 무엇보다 한데 노점을 깔더라도 주인이 직접 벌어먹는 시장이 많아야 좋은 나라 아닌가.

그건 그렇고, 서울 종로에 가면 신진시장이라고 있다. 종로5가에서 동대문 넘어가는 뒷길이다. 1970년대에 아마도 시장이라고 명명이 된 모양인데, 그 전에는 그냥 골목이라고 생각했다. 책방과 식당 술집이 많았다. 크게 보면 종로에서 이어지는 아랫 피맛골의 끝부분이라고 해도 된다.

껍질맛이 기가 막히다던데

이 시장 근처에는 맛있는 집들이 많다. 돼지 창자를 삶아 맵게 볶아주는 곱창 골목도 좋고, 닭한마리 골목도 좋다. 조금만 더 가면 흔한 백반집들이 늘어서서 방산시장으로 연결되는데, 생선 굽는 연기가 매캐하다. 연탄불에 두꺼운 주물 석쇠를 얹어서 이런저런 생선을 굽는다. 생선이 좋던 시절에는 구색도 맛도 좋았다.

얼마나 장사가 잘 됐는지 주문을 받고 생선을 구워서는 도저히 제때 댈 수 없었다. 석쇠에는 늘 제사 고임처럼 구워낸 생선이 쌓여 있었다. 생선은 막 구워야 제맛인데 이렇게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회전이 빨랐기 때문이다. 요즘도 언제나 이 골목 생선구이 집 연탄불 석쇠에는 구운 생선이 그득히 쌓여 있다. 무슨 조화인지 쌓아둔 생선을 구워도 제법 촉촉하다. 누구는 미리 소금물로 염지를 해서 그렇다 하고 누구는 연탄불로 구우니 초벌로 구워둬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이 골목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생선을 굽고 판다. 요리도, 홀도 젊은 외국인이 맡는 일이 흔해졌다. 겨울이라 생선 좋을 때다. 임연수어가 반가웠다. 막걸리에 구운 임연수어를 먹었다.

어렸을 때 좋아하지 않는 생선이 임연수어였다. 아마도 무게 대비 제일 싼 생선이었을 거다. 동해에서 오는데, 영 볼품없는 생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강원도 속초에 사는 친구가 하나 있어서 그쪽 바다 생선에 아주 해박하다. 그의 말로는 “임연수라는 부자가 동해안에 살았는데, 이 생선껍질로 쌈을 싸먹다가 망했더라. 그래서 임연수어가 되었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전라도에서는 대신 민어껍질이 거론된다. 역시 부자가 좋아하다가 망했다는 말이다. 생선껍질은 사실 웬만한 건 다 맛있다. 안쪽에는 기름기가 배어 구우면 바삭해진다. 꼭 별난 생선을 찾을 것도 없다.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며 꽁치 껍질 맛은 전 재산까지는 아니어도 주머니를 탕진해서라도 먹고 싶은 맛이다.

옛날에 임연수어는 서울에서는 제 모양을 갖춘 걸 별로 보지 못했다. 꽝꽝 얼어서 제 동료들끼리 사각 상자에 뭉쳐서 들어온 걸 한겨울 생선 노점에서 억지로 떼어내어 팔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각진 몸뚱이 그대로 신문지에 둘둘 싸서 사가지고 왔다. 엄마는 그걸 또 얼른 토막을 내서 구웠으니 제대로 된 임연수어를 못 본 것이다.

나중에 나이 들어 속초에 갔을 때 시장에서 멀쩡한 생물 임연수어를 봤다.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 무늬 때문이다. 임연수어 껍질은 돌돔처럼 어두운 색의 띠를 두르고 있다. 누런 몸뚱이에 흐릿한 갈색 띠가 교차하는데, 가만 보면 산봉우리들을 먹의 농담으로 진하게 또는 연하게 그리는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무늬까지 특이한 껍질이 맛도 천하일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맛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임연수 선생한테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껍질 먹다가 망할 맛이 맞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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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불에서 천천히 굽는 게 비법

나중에 왜 임연수 선생이 파산했는지 수긍할 일이 생겼다. 의정부역 앞에는 제일시장이라고 아주 큰 장터가 있다. 시장이 태반 죽은 게 요즘이지만 이 시장은 특이하게도 젊은이들도 많이 온다. 바글바글하다. 시장 구경은 나로선 별것 없고 바로 지하로 내려간다. 어디가 입구인지도 모르고, 그저 커다란 고래 같은 시장의 내장을 헤집어가다 보면, 불쑥 지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나는 이 시장의 구조도 잘 모르는데, 아마도 시장의 지하 대부분이 술집이다. 역시나 어느 동네나 그렇지만 호남집이니 목포집, 전주집 같은 데 손님들이 많다.

처음 이 지하의 마굴 같은 술집을 소개한 건 출판하는 이주호 사장이었다. 그는 의정부 사람으로 혈관에 부대찌개 국물 농도가 있다고 자처하는데, 그날은 1차가 부대찌개 집이었고, 2차가 제일시장이었다. 그가 앞장선 가게 상호는 한양집. 호남 쪽 가게들이 대궐기하는 속에서 조용하게 한양이라니. 이 거대한 먹자타운은 의정부 술꾼들은 다 아는, 왕년에 의정부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진짜배기 술집으로 가득하다. 이 지하 마굴은 옛날 만홧가게 같은 의자에 앉아 술병을 쓰러뜨리는 사내들로 꽉 차 있다. 각기 상호를 붙인 가게들이 빼곡하고, 그 경계는 분명하지 않아서 이 집 갔다가 화장실 갔다 오면 옆집에 앉아버리기 딱 좋다. 그러니, 상호보다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을 기억하는 편이 유리하다.

한양집은 술집이 그렇 듯이 안주 이름을 써 붙여 놓기는 했지만 그냥 모양이고 장식이다. 그날그날 좋은 안주, 물이 되는 음식, 제철이 뭔지 물어보고 시키는 게 정석이다. 철에 맞춰 뭐가 되는지 물어보면 아줌마는 전화기를 든다. 1층에 있는 어물전에 재고와 수질(?)을 확인하고 안줏감 재료를 주문한다. 그날은 임연수어가 좋다고 한다. 아니, 임연수어 따위를 먹자고 제일시장에 올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릴 때 질려버린 맛없는 임연수어. 우리 엄마가 돈 없을 때 사던 망할 생선. 주인 체면에 그러자고 해서 주문을 했다. 한양집 주인은 생선을 구울 때 아주 오래 걸린다. 지하이니 직화를 쓸 수도 없고, 좁은 주방에서 쭈그리듯 고개를 꺾고 요리해야 한다.

기어이 임연수어가 나왔다. 주인은 내 마음을 읽은 듯, 임연수어가 임연수어가 아닌 것처럼, 등의 무늬를 감추고 등뼈가 보이게 접시에 담았다. 이 생선이 맛있다는 걸 알려준 집이었다. 프라이팬에 오래 지진 껍질은 바삭하면서도 맛있는 기름도 품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도화지 씹는 맛이라고 생각했던 살점도 쫀쫀하게 입에 붙었다. 임연수 선생이 패가망신한 건 이유가 있었달까.

주인이 알려주신 비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임연수어는 거의 러시아산이다. 큼직한 놈일수록 더 그렇다. 그러니 그리 알고 먹는다. 통마리보다는 배를 갈라서 굽는다. 그래야 팬에 지져지는 부위가 넓어져서 더 바삭하다. 껍질을 바삭하게 굽자면 낮은 불에 천천히 구워야 한다. 손님들이 빨리 달라고 난리를 쳐도 버틴다. ‘마리아주’는 소주다. 아무렴.

집에서 굽는다면 에어프라이어를 추천한다. 기름을 살짝 바르고, 맛소금을 뿌린다.(미원아, 고맙다) 중간 온도로 오래 굽는다. 껍질을 벗겨내어 밥에 올려 먹어본다. 임연수 선생의 행각에 동의한다.

글·사진 박찬일 요리사

익명과 혼술의 조합을 실천하며 음주 생활을 한다. 전국 왕대폿집 할매들 얘기를 듣는 중. 사라지는 것들에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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