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건축가들이 작업한 파일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무료로 볼 수 있는 뷰어를 설치하면 컴퓨터는 물론이고 스마트폰에서도 파일을 열어 확인할 수 있다. 임호림 제공
집을 짓는 첫 단계는 설계다. 당연히 설계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지만 가족이 원하는 것이 모두 녹아들어간 집을 만들려면 맞춤형 설계가 필요하니 불필요한 지출은 아니다. 우선, 설계를 맡기고 싶은 건축사와 건축사무소들의 리스트를 뽑아보았다.
건축주는 대개 건축 실무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요구 사항을 설계에 충실히 반영해줄 설계자(건축사)를 찾아야 한다. 서로의 궁합도 잘 맞아야 한다. 설계자는 건축주의 요구가 실현 불가능하거나, 구조적으로 중대한 결함이 있거나, 또는 효율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명확히 지적하고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양쪽의 의견이 평행선을 지속하면 시작 단계부터 난항이다.
건축사의 업무는 설계 도면을 납품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단독주택은 통상 설계자에게 감리책임까지 지도록 계약을 한다. 시공자가 설계안대로 집을 짓는지 ‘매의 눈’으로 감독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즉각 수정하도록 지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소비자의 입장에서 좋은 건축사는 건축주를 만족하게 할 만한 좋은 디자인을 뽑아내는 능력은 기본이고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거기에 현장에 수시로 나와야 하는 성실함도 갖춰야 한다. 때론 시공자와 싸울 수 있는 강한 전투력도 필수 조건이다. 일종의 슈퍼히어로라고나 할까.
나는 꽤 오래전부터 단독주택 짓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건축가들의 작업을 정리해둔 누리집이나 에스엔에스(SNS)를 구독했다. 이게 큰 도움이 됐다. 건축에 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분, 깔끔한 하얀색 협소 주택 설계로 명성을 얻은 분도 있고 서울 근교에 멋진 전원주택을 설계해 상을 여럿 받은 건축사도 있었다.
다섯명 정도를 추려 약속을 잡아 사무실에 방문했는데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세상의 어떤 일이든, 고르는 게 가장 힘든 법. 고민 중에 갑자기 현덕씨가 생각났다. 현덕씨는 몇해 전에 서울 남산 해방촌에서 내가 꾸려가던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위층에 살며 친해진 동생이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세탁소와 카페가 합쳐진 런드리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집과 전공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집에 대해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왠지 나에게 잘 맞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건축사 ㅎ 소장 얘기를 꺼냈다. 그렇게 인연이 성사된 것이다.
ㅎ 소장이 누리집에 올려놓은 포트폴리오를 살펴봤다. 뭔가 ‘찌르르’한 느낌. ‘이거다!’ 바로 설계의뢰를 결심했고,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나는 가족의 소개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리해 이메일로 보냈다. 말보다 글자로 남기는 게 명확할 것 같아서다. 대충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지금 봐도 구구절절하다.
도면은 건축신고를 하기 위한 허가도면에서 시작해 실제 건축행위에 적용하기 위한 실시도면으로 이어진다. 실시도면은 층별 평면도, 바깥에서 바라본 입면도, 전기 및 조명 배선도, 배관 상세도 등 여러 장으로 이루어진다. 여러 장의 평면도를 포토샵으로 합친 모습. 임호림 제공
“40대 부부와 10살 아들,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을 준비하던 중에 코로나 사태가 길어져 지금은 가사노동과 아이 키우는 일을 맡아 하고 있어요.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고요, 막내인 고양이 ‘자말’은 새끼 때부터 5년째 함께 살고 있습니다. 공사는 석달 남짓한 기간 안에 마쳐야 합니다. 공사 기간과 가용예산을 고려해 1층과 2층을 대수선하는 것으로 큰 방향을 정했습니다. 3층에 수직증축이 가능하다면 일부분이라도 덧붙이면서 옥상을 정원처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1층 일부를 주거와 분리해 제 가게를 열고 싶어요. 주변 집들의 시선은 차단하면서 외부의 빛을 집 안으로 최대한 끌어들여 춥거나 어둡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깔끔한 디자인을 좋아합니다.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내외부 마감소재와 컬러도 최대한 단순하기를 바랍니다. 책장을 제외한 수납은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감추었으면 좋겠습니다. 넓은 주방에서 가족들을 위해 맛있는 것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수납공간이 많은 아일랜드조리대는 필수입니다. 식자재를 보관하기 위한 주방창고(팬트리)도 만들어주시고요. 각 층과 방마다 시스템 에어컨을 달고 열 회수율이 높은 열교환 공조장치도 함께 설치하면 좋겠습니다.(중략)”
지난해 겨울, 눈 내리는 고즈넉한 덕수궁 옆 정동길에 있는 ㅎ 소장의 사무실에 방문해 그를 직접 만났다. 현덕씨의 추천처럼 서로 얘기가 통했다. 바로 계약을 한 뒤 소장과 현장에 방문해 실측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설계안이 나왔다. ‘와우.’ 궁상맞아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던 나와 우리 가족이 원하는 것 대부분이 녹아들어 있었다. 이미 나는 머릿속에서 집들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로 ‘오케이’가 된 것은 아니다. 예산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더하고 뺄 것을 논의하고 수정 설계안에 반영했다. 이것도 최종안은 아니다. 대수선은 철거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큰 틀의 디자인 기조는 유지하면서 디테일한 부분은 수정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한가지 당부를 드린다면, 부동산을 계약하기에 앞서 사려는 부동산의 ‘용도지역’을 꼭 확인하시라는 것. 어떤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는지에 따라 건폐율과 용적률이 달라지고 건축행위가 제한되기도 하고, 특정한 분야의 상업행위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용도지역은 국토교통부에서 제공하는 누리집 ‘토지이음’(eum.go.kr)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집은 도시지역, 제2종일반주거지역에 해당하고 7층까지 지을 수 있으며 건폐율과 용적률의 허용 범위는 각각 60%, 200%에 해당했다.
이제 설계안도 나왔다. 드디어 첫 삽을 뜨는 건가. 해를 넘긴 올해 첫날 이른 아침, 새집 근처 용왕산에 올랐다. 떠오르는 해를 보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였다.
임호림(어쩌다 건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