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왕의 와인’ 만든 고장의 솜씨가 묻어나네

등록 2021-08-27 05:00수정 2021-09-28 17:25

권은중의 화이트
천연 기포 매력적 이탈리아 피에몬테 가비…채식 도시락과 ‘굿’
반피 프린치페사 가비아(Banfi Principessa Gavia). 사진 권은중
반피 프린치페사 가비아(Banfi Principessa Gavia). 사진 권은중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는 감탄을 요즘 많이 하게 된다. 매일매일 제법 놀라운 일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의 하나가 배달 음식이다.

나는 코로나19 사태 전까지 배달 음식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배달 음식을 찾는 빈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고역이었다. 배달 음식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다 보니 요령이 조금씩 생긴데다 ‘이런 음식이 배달된다고’라는 생각을 할 법한 놀라운 음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웠던 배달 음식은 병아리콩을 주축으로 한 중동식 채식 도시락이었다. 일반적으로 샐러드 도시락은 남자가 끼니로 먹기에는 너무 가볍다. 그래서 대부분 닭가슴살이나 연어살을 얹어주는데 이런 샐러드의 맛은 대부분 빤했다.

그런데 최근 내가 즐겨 먹는 채식 도시락은 병아리콩을 삶아서 참깨, 올리브유 등과 으깨 만든 훔무스를 베이스로 하는데 아주 든든했다. 또 도시락에는 피타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알려진 중동식 납작빵(쿠브즈 아라비)도 함께 넣어준다. 아보카도, 당근, 양배추, 올리브 절임 등도 들어 있어 채소만으로도 풍성한 맛을 준 아이디어도 좋았다. 정말 탄탄한 구성이었다. 이 도시락 덕분에 나는 올해를 우리나라 채식 도시락의 원년으로 여길 정도다.

이렇게 실하면서 이렇게 세련된 도시락을 주문할 때마다 나는 좋아하는 화이트 와인을 따곤 한다. 가비(Gavi)다. 가비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 알레산드리아의 마을 이름이다. 이곳의 코르테제(cortese)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화이트가 가비다.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인 바롤로만큼은 아니어도 가비도 화이트로는 꽤 유명하다. 가격도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치고는 싼 편이 아니다. 현지에서도 20유로는 훌쩍 넘는 고가다. 그렇지만 한번 마셔보면 이 와인에 왜 ‘공주의 전설’(이 공주 이름이 가비 혹은 가비아다. 이게 지역명이 되었다)이 붙었는지 금세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와인의 향과 맛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우아함이 묻어난다. 가비는 배·사과·라임 같은 과일 향과 여기에 더해진 꽃향기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농밀하기 그지없다. 화이트 와인의 대명사인 샤르도네나 소비뇽 블랑과는 또 다른 결의 맛과 향이다.

여기에 가비는 포도 품종이 가진 당도 덕에 기포가 저절로 생긴다. 이 천연 기포는 가비의 우아함에 상큼함까지 더해준다. 그래서 가비를 디저트 와인으로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가비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 함께 우리 집에서 가장 즐겨 마시는 화이트다. 화이트이지만 무려 6개월을 스테인리스 통에서 숙성시켜 출고한다. 왕의 와인인 바롤로를 만들어온 피에몬테 양조자들이 작심하고 만든 화이트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귀한 와인을 배달 음식과 함께 마시는 건 어찌 보면 불경이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이 채식을 선호하는 사람의 취향마저도 섬세하게 존중해주는 사회가 되었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거기에 병아리콩 소스에 피타에 아보카도에 올리브 절임까지 넣어주는 국제적 감각까지 갖춘 도시락은 귀한 가비를 내놓기에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차림이라고 할 수 있다. 권은중(음식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1.

가방에 대롱대롱 내가 만든 인형…“내 새끼 같아” [ESC]

[ESC] 주꾸미 철? 주꾸미 알 철! 2.

[ESC] 주꾸미 철? 주꾸미 알 철!

[ESC] 외도한 남편이 졸혼을 하자고 합니다 3.

[ESC] 외도한 남편이 졸혼을 하자고 합니다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4.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건강하고 살 안 찌는 중국음식 만들기 5.

건강하고 살 안 찌는 중국음식 만들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