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연의 자는 것도 일이야
언스플래시
“야, 나도 매일 까먹어! 이제 늙어서 그래!”마침내 <에스비에스>(SBS) <펜트하우스>에 기억상실과 치매가 등장했다. 그전까지 <펜트하우스>는 맥주 한캔을 마시며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드라마였다. 내가 얼마 전 그 병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그런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황당한 설정에 코웃음 치면서도 예측불허 이야기가 품은 쫀득한 긴장감을 즐겼을지 모른다. 기억상실과 치매라니. 이 얼마나 케이(K)-드라마다운 클리셰이자 절묘한 이야깃거리인가. 유감스럽게도 이번엔 그 미덕을 만끽할 수 없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맥주가 썼다. 그곳은 불면을 해결하려고 찾은 동네 병원이었다. 내가 잠을 못 잔다고 토로하자 의사는 검사부터 권했다. 수면다원검사(여러 방법으로 수면 상태를 기록하는 검사)는 아니고, 뇌파인지기능검사라고 했다. 의사는 전선이 연결된 쇠붙이에 누리끼리한 마요네즈 같은 물질을 바르더니 그걸 내 이마에 부착하며 말했다. “도형이 계속 나올 거예요. 도형 모양이 다르면 왼쪽을, 같으면 오른쪽을 누르세요.” 까짓거 뭐. 나는 전날도 4시간을 채 못 잔데다 불금맞이 홈술까지 한 탓에 거의 좀비 상태였음에도 그 정도는 할 정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오판이라는 사실은 몇초 지나지 않아 알아챘다. 방향과 면적을 연신 뒤바꾸며 출몰하는 도형을 보자니 정답을 맞혀야 한다는 강박감이 밀려왔고, 술이 덜 깨서인지 방향키조차 손에 붙지 않았다. 그렇게 우왕좌왕 20분을 보낸 뒤, 의사가 꺼낸 첫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지하철 타다 말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지, 이거 왜 탔지, 하지 않아요? 엉뚱한 물건을 냉장고 같은 데 두고 찾을 때는요?” 숙취가 싹 달아나는 기분. ‘저기요, 제가 치매라는 건가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한 척하려 애쓰는 모습이 뻔히 보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적은 없는데요. 그 정도면 치매 아닌가요?” 의사는 숨길 수 없는 적의와 당혹감을 감지했는지 움찔한 기세로 얼버무렸다. “아, 그렇다기보단…. 검사지를 보면 정답률이나 인지 강도, 집중력은 높은 편인데, 인지 속도가 거의 바닥이에요. 방전된 자동차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거랑 비슷합니다. 이렇게 편차가 크면 해야 할 걸 할 때만 에너지를 확 쏟고, 쉬어야 할 땐 제대로 못 쉬죠. 뭔가 열심히 할 땐 괜찮다가 쉴 땐 오히려 피곤하지 않아요?” 알 듯 모를 듯 뻔한 듯 아닌 듯 오묘한 설명. 그가 제시한 처방은 이랬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라는 것, 그럼 신경의 톤이 유지돼 에너지가 올라가고 불면도 해결되리라는 것, 무엇보다 1회당 16만원짜리 상담을 받으라는 것. “제 상담은 다른 상담과 좀 달라요. 그러니까….” 친절하지만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그가 말했다. “상담 꼭 받아보세요. 오늘은 제가 다음 상담이 있어서 이만.” 진료는 5분 만에 끝났다. 뭐를 싸다 끊긴 느낌이랄까. 진료비는 15만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새로 생긴 근심거리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무시하려 해도 무시되지 않는 의사의 말이 머릿속을 점령하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뿐이었다. 최근 들어 아는 단어가 빨리빨리 떠오르지 않는 게 가장 거슬렸다. 저장된 정보가 제대로 인출되지 않고 혀끝을 맴돌기만 하는 ‘설단현상’(tip of the tongue)이었다. ‘아, 그 뭐야’, ‘그거 있잖아요’ 같은 간투사를 자주 썼고, 그 대상이 내 삶의 근간이 된 책이나 작가, 인상 깊게 여행한 외국 지명이 될 땐 어이가 없기도 했다. 건망증도 우려스러웠다. 절친한 친구가 이사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거나, 꼭 챙겨야 할 물건을 집에 두고 외출한 일이 못내 걸렸다. 아아, 암울하구나. 예전에는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 하나는 쓸 만했건만, 잊어도 될 것까지 너무 기억해 괴로운 적도 많았건만, 이젠 치매 증상을 추궁당해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되다니. 나는 밤새 뒤척였다. 이튿날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는 나는 잠을 잤다기보단 지리산 종주라도 한 몰골이었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고 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누가 알았겠나? 잠 좀 자보겠다고 선택한 병원행이 오히려 수면의 질을 더 떨어뜨릴 줄이야. 세상 시름 혼자 떠안은 것처럼 괴로운 며칠을 보낸 후, ㄱ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전문의를 딴 뒤 개인병원을 하는 친구였다. ㄱ은 곧 전화를 걸어왔다. “야, 나도 매일 까먹어! 이제 늙어서 그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는 걸. 그 말을 들으려고 ㄱ에게 연락했다는 걸.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기억력과 인지기능이 저하된다는 말, 그 말을 또 다른 의료인에게 듣는 것만으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제야 돌이켜보니 그때 그 의사가 나더러 콕 짚어 치매라고 한 적도 없었다. 여러모로 그 검사는 정교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날 숙취가 심했고, 신중하게 정답을 고르려다 문제를 몇개 놓쳤을 뿐이다. 의사가 한 수십마디 중 겨우 그 한마디에 목을 맬 필요도 없었다. 비로소 정신승리에 성공한 나는 오늘은 푹 자겠구나 싶었다. ㄱ이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너 잠은 정말 잘 자야 돼. 계속 그렇게 못 자면 진짜 치매 걸린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무시무시한 소리람. 나중에야 알았지만, 만성 불면이 기억력을 훼손할 뿐 아니라 치매까지 유발한다는 건 연구 결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다만, 나는 잠시나마 잊기로 했다. 정녕 치매가 두렵다면 지금 필요한 건 머리를 비우는 것이지, 걱정거리로 전락할 정보를 채워 넣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생각의 퓨즈를 끊어야 할 때. <펜트하우스> ‘다시보기’를 눌러야 할 때였다. 이번주는 본방을 못 봤다고 말했던가, 안 했던가? 오락가락하더라도 부디 이해해주시라. 잠을 못 자서 몽롱한 상태다. 강나연 <허프포스트> 편집장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는 걸.
그 말을 들으려고 ㄱ에게 연락했다는 걸.
이주의 ‘불면 극복’ 솔루션
1. 오지랖형 조언 걸러 듣기. 귀가 두개인 이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는★★★★★
2. 필로미스트 베개에 뿌리기. 아로마 향이 피로를 풀어주고 긴장을 완화해줌★★★★★
3. 시계는 무소음으로. 째깍거리는 소리가 잠 못 자는데 시간만 간다는 불안을 강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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